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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혜인 Nov 26. 2018

이불속 세상, 참 행복하다

행복은 소소한 것으로부터


화들짝 놀라 깼다. 시계는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늦었다!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오늘 무슨 요일이지? 월요일. 당장 일어나서 준비해야 한다. 늦지 않으려면. 이불을 꽉 쥔다. 이내 곧 입꼬리가 조금씩 위로 올라간다. 후훗. 머릿속 시계야, 출근해야 한다고 마음껏 외쳐라. 최대한 오래.


그 생각을 하면서 사치를 부린다. 아니, 그 생각이 지금을 더욱 명품으로 만든다. 이불속 세상. 요 소소하면서 기특한 세상. 사흘 전 통장에 퇴직금이 들어왔다. 몇 달 동안은 자유다. 그런데 이 홀가분함이 낯설다. 정말 자유를 느껴도 되는 걸까. 일하면서 누적된 스트레스와 중압감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


그렇게 괴롭히던 상사의 연락이 없다. 어색하다. 퇴사 하루 전날 고객들에게 보냈던 청구서가 생각났다. 대표가, 후임이, 그들에게 연락해서 돈을 잘 받을 수 있을까? 회사 생각은 쉽사리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 생각을 머릿속에 가득 채우고 침대에 누워 아침햇살을 맞는다. 나는 알고 있다.

괜찮다. 그 일을 처리하지 않아도, 책임지지 않아. 이제는.




그 사실이 햇살보다 더 따스하다. 이 괴리감이, 최대한 오랫동안 내게 머물러주길. 얼마나 긴 시간 동안 꿈꿔온 순간이었던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최고의 평온함. 진정으로 무엇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 머나먼 외국으로 몇 번을 떠나도 느끼지 못했던 기분.


참 느끼고 싶었던 기분. 뭘 해도 느낄 수 없던 그 기분을 이불속 세상에서 느끼게 되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입사 전에는 일을 시작하기를 그렇게 바랐었는데, 막상 입사한 뒤에는 조금씩, 사직서를 내고 싶어 졌다. 입사와 퇴사 모두 겪고 알게 된 건, 둘 다 굉장한 기쁨을 준다는 것. 딱 그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에 말이다. 무엇 하나가 우월하다 말할 수 없을 만큼 둘은 똑같다. 더는 불안하지 않을 수 있는 익숙함 속에 기쁨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기쁨은 익숙한 삶의 패턴이 변할 때 찾아왔다.




퇴사하면 도서관에 가서 그간 읽고 싶었던 책을 마음껏 읽고 싶었다. 아, 그런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이불 밖으로 나올 수가 없다. 따스한 햇살에 눈꺼풀이 다시 무거워진다. 조금 더 자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는 아침 조금만 더 느끼고 싶다.


도로가 하얗다. 새벽에 눈이 왔었나 보다. 차가운 바람을 타고 들어오는 햇살을 맞으며 이불을 얼굴 바로 아래까지 끌어올린다. 지금 집 밖으로 나른한 몸을 끌고 나가지 않아도 된다. 따뜻하게 들어오는 전기장판의 온기는 이 순간 더 낭만을 더한다. 조금 더 자고 일어나도 고작 점심시간쯤이겠지. 그래도 여전히 해는 쨍쨍하고, 그때부터 하루를 시작해도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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