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했다. 그게 뭐든 ‘마지막’이 되는 순간, 그전까지 별 게 아니던 것들이 갑자기 별 게 있어진다. '마지막'으로 오는 날, '마지막'으로 말할 사람, '마지막'으로 보내는 시간, '마지막'으로 하는 일.
하루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게 있었다면 ‘마지막’이라는 걸 핑계 삼아 비싼 레스토랑을 갔다는 것이다. 중요한 손님이 올 때마다 갔던 파스타 집. 여기 음식은 하나당 기본 만 원은 넘었다. 우리는 꽤 오랜 시간 그곳에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상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라는 걸 알아서 그런 걸까. ‘평소’라는 말의 의미는 더 빛이 났다.
점심시간 이후의 시간은 총알같이 지나갔다. 후임이 내가 없더라도 평소와 같은 일상을 꾸려나갈 수 있게 준비했다. 맡고 있던 고객들의 상황, 현재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기술적으로 체크해야 할 일들.... 하나하나 말로 이야기했고 글로도 적었다. 지금까지 영수증을 모으고 기록해두었던 회계 파일도 넘겨주었다. 내 일이 타인의 손으로 넘어가는 건 한 순간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 이상하게도 파일을 건네고 싶지 않았다. 지난 시간, 네가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느끼는 순간. 처음에는 고맙게 시작했지만 네게 익숙해질수록 나도 모르게 그 마음을 잊었다. 그래도 나는 너를 좋아했어.
알 수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는....
방만하게 저장된 컴퓨터 파일, 몇 부씩 인쇄된 불필요한 서류, 내 물건으로 가득 채워진 책상. 나의 흔적을 지웠다. 사소하고 소소한 것 하나까지 내 흔적이 묻어 있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이곳에 내가 머물렀구나. 지난 시간 동안, 일에 익숙해지는 만큼 회사와 고객에 대한 마음의 무게도 짊어져왔나 보다. 하나씩 지워나가는 건, 내게 남은 그들을 향한 책임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상상으로만 해오던 완전한 퇴장을 했다. 피부에 닿는 공기의 무게는 평소와 달랐다. 그 차가운 공기가, 마치 내게 새로운 시작을 말하듯 옷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 기분 좋은 한기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일상이었던 회사는 이제 지난 시간의 일부가 되었다.
내일부터 시간 부자가 된다.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시간 부자가 된다고 공표하는 일은, 이상하게 부끄럽다. 지금까지의 패턴과 다르기도 하고, 남들과 달라지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잘 모르겠다. 내일부터는 낯선 패턴의 하루를 살아갈 것이기에. 앞으로도 끝없이 하나의 패턴을 갖고 버리는 순간들을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익숙했던 하나의 패턴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