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했던 유학원은 규모가 작은 회사였다. 그러다 보니 운영 방식도 독특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외주였다. 기업으로써의 외주가 아닌 개인으로서의 외주. 사무실에 상주하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한날은 외주 실장이 찾아왔다. 방문객이 있을 때면 대표님은 손님과 단둘이 밥을 먹었다. 그런데 그 무렵엔 밥 먹는 자리에 나도 같이 데려가던 때였다. 하지만 방문자와 함께 밥을 먹으면 식당에 오랫동안 앉아 있게 돼서 괜히 피곤했다. 그럴 때 내 머릿속에 온갖 종류의 생각이 돌아다녔다.
‘글을 쓰고 싶다. 떠오르는 이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 아까 읽고 있던 글을 읽고 싶다. 얼른 일어나서 사무실로 돌아가고 싶다. 나만의 오롯한 공간 속으로.’
“누가 어떤 학원을 차렸는데 굉장히 실적이 좋대요.”
“돈은 많이 버는데 유지비가 어마어마하게 나간다고 하더라구요.”
“제주도는 지금 교육에 돈 쓸 사람이 많으니까 좋은 시장이긴 해요.”
이야깃거리는 끊이지 않았다. 제주도에 국제학교가 많다. 외국에 유학 보낼 상황은 안 되지만 그래도 외국 학교에서 공부를 시키고 싶은 부모들이 자식을 그 학교에 많이들 보낸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영어로 수업을 듣고 최대한 외국을 접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 순간 확 내 머릿속에 들어온 단어 두 개가 있었다.
돈, 그리고 노력.
엠제이 드마코가 쓴 “부의 추월차선”은 많은 사람이 지금 돈 사냥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버는 돈보다 훨씬 큰 비용을 소비하며 시간 노역의 굴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교육과 정부, 언론은 ‘성공’의 기준이 ‘돈을 잘 버는 것’이라는 암묵적인 믿음을 심기고, 기업은 부자의 이미지를 형성하여 돈을 계속 쓰게 만든다. 사람들은 먼 미래에 부자가 되어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돈을 모으지만, 과소비가 만연하는 한 이는 불가능하다. 그렇게 돈을 모은들 당신은 빈자로 살다 부자로 죽을 뿐이다.
제주 국제학교 엄마들의 돈 쓰는 형상을 보며 생각했다. 자식 교육으로 그렇게 돈을 쓰면 학원 원장은 많은 돈을 보유한 부자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비싼 임차료, 직원들 월급, 유지비 등 나갈 돈이 많다. 그렇게 분산된 돈은 다시 또 어디론가 분산되고, 또 분산되어 날아갈 것이다. 그 돈은 다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아이들을 그런 국제 학교에 보내어 비싼 학원비 등을 대려면 아무리 돈을 잘 번들 정말 힘들 것 같다. 그렇게 자식을 키우면 자식들이 잘살 것이라는 희망으로 보내는 것이겠지. 그런데 어린 나이에 낯선 언어로 무자비하게 머릿속에 지식을 넣은 아이들은 정녕 행복할까?
하고 싶은 것, 놀고 싶은 것을 다 참고 엄마가 시키는 걸 하면서 자연스레 보상 심리가 생길 테다. 몇 살이 되면 이걸 해야지, 저걸 해야지, 이건 더는 하지 말아야지.
그런데 문제는 노력의 대상이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바뀐다. 어릴 땐 성적 잘 받는 거로, 대학 다니면 스펙 잘 쌓는 거로, 졸업하면 좋은 데 취직하는 거로, 취직하면 승진하는 거로, 승진하면 노후 준비하는 거로, 퇴직할 때가 되면 더 오랫동안 버티는 거로, 퇴직하면? 또 어딘가에서 돈 벌 수 있는 궁리를 하며 일할 기회를 찾게 되겠지. 아니면 어디 탈 안 나게 해서 돈 빠져나갈 구멍을 줄인다거나.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나도 세상이 요구하는 노력만 해왔다. 그래서 뭐 하나 두드러지게 잘하는 게 없다. 여전히 계속 무언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뭐라도 꾸준히 실체가 있는 노력을 하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