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종종 그런 생각을 해본다. 지하철을 타거나 버스를 탈 때 내가 이 앞차를 타거나 뒤차를 탔다면 이 공간 안에 전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겠지. 특히 내 옆자리에 함께 탄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그 사람과 나 둘 중 한 명이 어떤 정거장에서 내리면 우리의 만남은 거기서 끝난다. 그리고 서로는 서로와 함께였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걸 인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혹자는 이런 게 뭐가 인연이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바로 앞차를 탔더라면, 뒤차를 탔더라면, 옆에 앉은 사람은 달라지지 않을까? 그렇다면 하필 그 사람 옆에 앉게 된 이 순간이 과연 우연이기만 할까?
장강명 작가님이 쓴 “그믐, 세상이 당신을 기억하는 방식”이라는 책에서 나온 한 질문이 떠오른다.
어떤 관계의 의미가 끝에 달려 있는 거라면, 안 좋게 끝날 관계는 아예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그 끝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과정이 아름답고 행복하다 하더라도?
선연과 악연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 걸까? 대개 안 좋게 끝나는 관계를 악연이라고 부르는 듯하다. 한동안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안 좋게 끝났다는 건 그 사람과의 기억이 선명하다는 게 아닐까?’
어찌 됐든 내 인생에 한 획을 그은 사람 중 끝이 안 좋은 사람도 분명히 있다. 그 사람과의 관계로 나를 돌아보고 느낀 적 없는 감정을 느끼고 하지 않았던 생각을 했다면, 그래서 보이지 않던 것을 보았다면 그 사람과의 인연은 악연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인연에는 다양한 끝이 있는 듯하다. 눈물을 펑펑 쏟게 만드는 끝, 기억조차 나지 않는 끝, 갑작스러운 끝, 서로 얼굴 붉히며 맞이한 끝…. 기억조차 나지 않는 끝을 맞이한 사람을 선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예전에는 자주 연락하고 지냈는데, 지금은 연락하기조차 망설여지는 끝을 맞이한 사람이 선연일까? 선연의 기준은 모호하다.
모든 인연은 언젠가 끝난다. 그리고 소중한 기억을 공유한 사람과의 끝은 언제나 인생에 한 획을 긋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은 대중교통 안에서 바로 내 옆에 있었는데 내리면 누구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사람보다는 의미가 있는 사람일 것이다.
선연과 악연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다. 끝이란 시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끝나는지와 상관없이 시작하게 된 모든 인연은, 어떤 식으로든 내 인생에 영향을 미친 인연은 그 자체로 선연이다.
흘러온 지난 시간 속에는 수많은 인연이 있다. 한때 소중했던 인연일지라도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인연이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여전히 기억이 난다면, 그 사람과의 끝이 어땠는지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선연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에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인연도 무수히 많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