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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혜인 May 30. 2019

심장이 다쳐야 늘어

자존감


 갓 브런치를 시작하여 첫 두 편의 글만 발행했을 때였다. 친구에게 브런치 글을 보여줬다. 친구가 세 번째 글은 첫 두 글과 느낌이 달라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어렵다. 어려워. 마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전 경연을 잘 벌인 친구들이 ‘다음 경연 걱정이다.’라고 말하는 바로 그 심정이 이런 심정일까? 친구는 지금까지 읽었을 때 앞으로 더 읽고 싶은 글이긴 한데 세 번째 글이 별로면 어떨지 모르겠다고 했다. 다른 분위기의 글을 써볼까 했는데, 내 글에 담을 수 있는 감성의 범위가 아직 많이 좁은 듯하다.


 언론고시 입문용 수업으로 김 모 기자님 수업이 그렇게 좋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었다. 수업을 신청한 시점에서의 나는 이미 장수생 반열에 오른 상태였다. 하지만 방송국에 합격한 사람의 대다수는 그 수업을 들은 사람들이라는 말에 김 기자님 수업을 한번 들어보고 싶었다.


 벼르고 벼르다 드디어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되었을 때, 토요일에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온종일 글만 쓰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바쁘게 살던 중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밥을 다 먹고 나니 친구가 디저트가 먹고 싶다고 했다. 밥도 먹고 운동도 할 겸 강남역에서 역삼역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그 사이 친구에게 할 말이라고는 글 얘기뿐이었다. 이미 6시간 동안 기획안 만들고 글 쓰고 왔으니 내 머릿속은 온통 글로만 채워져 있었다.




 갓 브런치를 시작하여 첫 두 편의 글만 발행했을 때였다. 친구에게 브런치 글을 보여줬다. 친구가 세 번째 글은 첫 두 글과 느낌이 달라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어렵다. 어려워. 마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전 경연을 잘 벌인 친구들이 ‘다음 경연 걱정이다.’라고 말하는 바로 그 심정이 이런 심정일까?


 친구는 지금까지 읽었을 때 앞으로 더 읽고 싶은 글이긴 한데 세 번째 글이 별로면 어떨지 모르겠다고 했다. 다른 분위기의 글을 써볼까 했는데, 내 글에 담을 수 있는 감성의 범위가 아직 많이 좁은 듯하다.


 친구가 내 글을 마지막으로 본 건 3년 전이라고 했다. 그래, 그때 아주 개발새발로 글 쓰던 시절이었다. 읽은 책도 많지 않았고 학교 다닐 때는 글을 많이 쓰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참 글 쓰는 게 그렇게 어려웠다. 남들은 글 써두고 내용을 고민하던 때에 나는 내가 문법적 오류를 만들지는 않았는지를 고민했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많이 늘긴 했다. 2년 전, 혹독한 독설을 퍼부으며 늘어나는 글 실력만큼 자존감을 갉았던 스터디원 생각이 났다. 그 스터디원은 “심장이 다치지 않으면 글이 늘지 않는다.”라고 했었다. 그래서 더 야속하게 혹평했고 그 혹평이 심장에 칼집을 내서 잠 못 이룬 밤이 많았더랬다.






 “이제 제법 글 쓰는 사람같이 글 써.”


 친구가 꺼낸 첫마디였다. 그 순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자존감이 고개를 들었다. 자존감. 타인과 ‘상관없는’ 스스로에 대한 존엄성. 그러나 타인과 영 분리된 개념은 아닌 것 같다. 어딘가에는 나를, 내 글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자존감도 지켜나갈 수 있으니까. 사람은 누군가와 끊임없이 교감하며 살기 때문에.


 소망이 생겼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을 위해 글을 쓴다.”라고 했다. 나도 조회 수나 누군가의 인정에 집착하지 않고 글을 쓰고, 작품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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