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혜인 Aug 23. 2019

열정적일 수 있는 건

에너지의 원천


 9살 이후로 결혼식 간 건 처음이다. 아니다. 사실 4년 전, 지인의 초대로 모 피디님 딸의 결혼식에 간 적이 있다. 피디님 성함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라서 딸 결혼식에 연예인이 되게 많이 왔었다. 그때는 그분의 딸과 내가 직접적으로 연결된 사이가 아니었기에 누군가가 결혼한다는 사실이  그렇게까지 와 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남자 친구 친구의 결혼식이었다. 학생 때 만났으면 같은 반이 될 수도 있었을 사이다. 직접적인 친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동갑이면 다 친구로 여겨져서 마치 내 친구처럼 느껴졌다. 신부도 나와 동갑이었다.


 울컥했다. 이제 그들은 새로운 체제로 들어간다. 견고한 관계의 틀을 쌓았다. 이건 법적으로 보장받는 체제이다. 우리는 그 체제를 쌓은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다. 새로운 관계에 관한 모든 가능성을 없애고 앞으로는 서로의 관계만 지켜나가겠다는 굳건한 약속을 하는 자리였다.


 무섭다. 나이가 들수록 내 주변 사람들의 체제가 조금씩 견고해진다. 그리고 한 번 견고해진 체제는 조금씩 딱딱해진다. 어릴 때는 체제를 형성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시도도 하고 유기적으로 생각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형성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움직이고 생각하는 것 같다. 견고한 체제는 안정함을 주지만, 새로운 것이 그 체제를 뚫고 들어가기는 어렵다. 새로운 것이 들어왔을 때 어떤 리스크가 있을지 몰라서 자신도 모르게 경계하게 되기 때문이다.


 교집합을 이루지 않는 이질적인 체제 속에서는 고립감이 심해질 수 있다. 그럴 때  젊은 날의 향수를 느끼고 ‘그 시절 좋았지’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같은 나이라는 게 주는 동질감은 생각보다 매우 컸다. 공감대는 내가 어느 군집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다른 것 같다. 같은 군집에 속해 있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내 삶을 그의 삶에 대입해 생각한다. 어떤 일을 묘사했을 때 그게 다양한 군집에 속한 사람들 삶에 스며들 지점을 녹여내면 그게 대중성이 되는 것 아닌가.


 그걸 찾아내는 게 내가 할 일이다. 그러려면 나이와 상관없이 모든 군집에 속한 사람들과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최근 드라마 분석 비평 스터디를 시작했다. 피디 지망생과 작가 지망생이 섞인 스터디다. 기존에 듣고 있던 수업만으로도 일주일이 바빴지만, 이 스터디를 해야 기획력도 생길 것 같았다.


 스터디를 모집한 사람이 단막극과 영화 위주로 커리큘럼을 생각해왔다. 내가 OCN “미스트리스”를 언급하면서 JTBC “미스티” 플롯을 따라 했지만 큰 뼈대 형성에 실패해서 시청률로 이어지지 않았다고, “미스티”와 비교하는 작업이 꼭 필요할 것 같다고 말하니까 스터디의 커리큘럼이 대폭 수정됐다. 원래 하려고 했던 작품은 조금 나중에 보기로 했다.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이야기하다 보니까 많이 친해졌다. 역시 이 길은 누가 오랫동안 버티느냐로 진짜 승부를 가른다. 그런데 사실 그 정도가 어디까지인지 모르겠다. 고차 단계로 올라갈수록 운이 많이 작용한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던데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나는, 포기할 것이었으면 진작했거나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 같다. 지금은 마치 내가 히말라야를 오르는 길의 산 중턱에 있는 느낌이다. 내려가는 데도 올라온 것만큼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상당한 노력이 소모되기 때문에 그저 계속 걸어서 올라갈 수밖에 없다. 걷다 보면, 언젠가 이 여정의 끝에 도달하겠지.


 A4 용지로 10장짜리 보고서를 만들어야 했다. 주제는 ‘스낵 컬처’였다. 방송사가 만들 수 있는 스낵 컬처는 어떤 게 있을까. 수업 듣기 전에는 글쓰기 위해서 자료 조사를 한다는 것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보고서를 쓰면서 그 부분이 조금씩 이해가 갔다. 글감 수집이 어떤 건지 점점 더 명확해졌다.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은 그런 느낌. 보이지 않는 더 깊은 정보를 발굴해내고 싶은 마음.


 그런데 좀 많이 힘들다. 시간이 너무 한정적인 것 같다. 그저께는 술과 밤새운 것 때문에 온종일 침대에 쓰러져 있었고, 어제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사실 보고서 쓰는 거 말고도 과제는 많았지만, 어제저녁 그 짧은 시간 안에 다 할 수는 없었다.


 여유 있는 순간이 찾아오면, 그 여유가 신선하고 고맙다. 어디론가 떠나지 않아도 진짜 휴가를 보내는 것 같다. 그 여유가 짧은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늘어진 여유를 누리기보다 짧더라도 강렬한 여유를 누리고, 항상 유한한 시간의 한계를 느끼면서 열정적인 삶을 살고 싶다. 그래서 이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기도.


 유한한 시간의 한계를 느끼며 살 때면,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생동적이고 역동적으로 살 수 있다. 그때 나오는 에너지를 느끼는 순간이 참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 같은 마음이었겠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