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혜인 Jul 18. 2019

같은 마음이었겠지

뜨거운 밤, 우리를 더 뜨겁게 했던 건


 방송국 입사용 글쓰기 수업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지금껏 배운 내용은 어떻게 글에 접근해야 하는지, 어떻게 글에 사실성을 녹여낼 수 있는지, 그렇게 녹여낸 사실성이 어떻게 하나의 메시지로 모이게 되는지 등에 관한 내용이었다.


 마지막 과제는 제시된 그림을 보고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이었다.


 기자님이 괜찮은 글에 성적과 함께 Pass를 주겠다고 했다. 조금 긴장됐다. 그동안 진짜 열심히 과제하고 공부했었는데 어떤 성적도 못 받고 Pass도 적혀있지 않으면 너무 허탈할 것 같아서. 그래서 기자님이 나눠준 과제 프린트물도 못 펴보다가 기자님 피드백이 내 차례에 닿을 때야 펼쳐 봤다.


B, 그리고 Pass.



 B인 이유는 제시어 밀착력이 부족해서였다. Pass인 이유는 완성도가 있고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건지 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행이었다. 글을 어떻게 쓰는 건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의 자세가 흉측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그저 내가 받은 인상일 뿐이다. 위에 앉은 아이가 사나이가 안고 있는 밑의 아이를 때리려고 하는데 사나이가 그사이에 껴서 대신 맞는 모습같이 보였다 해야 하나. (기자님은 이 해석이 잘못된 해석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매일 치이면서 자신의 사적 일상을 지키기 위해 공적 일상을 버리는 교사의 이야기를 썼다. 그 얘기에 대한 기자님의 평가는 제시어를 위태롭게 이어 붙였다는 것.


 저런 제시어가 나오면 해당 그림에 관해 잘 알아야 더 생동감 있고 구체적인 글을 쓰겠다. 그러니 더 많이 보고 많이 알아야 한다.  

  

 기자님이 나에게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내게 가장 문제 되고 힘든 관문이 글일 거라고 했다. 그 얘기는 많은 분들에게서 수차례 들었다. 글을 정말 열심히 쓰라고 했다.


 글 쓰는 게 어려운 이유가 있다. 내가 학교에 다니며 배운 글쓰기 방식과 글 평가 기준이 피디 시험에서 요구하는 글쓰기 방식과 글 평가 기준에 맞지 않는다. 그걸 바꾸는 것은 트로트 창법을 가진 사람이 발라드 창법으로 창법을 바꾸는 과정과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그걸 극복하면 나머지는 잘 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현직 기자에게서 듣는 그 “잘 될 가능성이 크다”라는 말은 정말 큰 힘과 위로가 됐다.




 더 열심히 읽고 더 열심히 쓰고 더 열심히 보는 것. 앞으로 남은 한정적인 시간 안에 해내야 할 일들이다.

 삶은 유한하기에 더 열정적으로 살 수 있다. 그 유한한 삶 안에 정해진 기한 내에 잘 해내야 하는 과업이 여러 가지가 있다. 수능, 취업, 결혼, 승진…. 그 과업을 잘 수행해 내기 위해서 과업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해야 하는데 그걸 파악할 시간이 너무 유한하다.


 그래도 그 덕에 순간순간에 많은 열정과 노력을 쏟을 수 있다. “지금 아니면 못 한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물론 순간순간의 불안을 느낄 수 있겠지만, 그 불안은 더한 노력과 열정을 쏟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불안에 지배당하지만 않는다면. 불안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계속 불안을 직면한다.




 한 방향의 수업이라서 같이 수업 듣는 친구들이 누군지 알 기회도, 친해질 기회도 없었다. 그래서 뒤풀이를 한다고 했을 때 재밌을지 의문이었다. 자기소개하긴 했지만, 다 기억하기는 어려웠다.


 1차에는 14명 있었는데 2차에 가니까 8명으로 줄었다. 2차에서 또 지망 분야와 이름을 말했다. 그런데 이미 술을 너무 마셔서 이름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기억나는 건 고작 얼굴과 지망 분야뿐.


 2차 술자리 이후, 남은 사람은 4명이었다.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사서 연세대학교로 들어갔다. 새벽 2시쯤이었던 듯. 그간 냈던 과제 중에서 어떤 글 써냈는지 이야기도 했다. 과제 글은 이름 없이 무작위로 번호만 적혀서 나왔었다. 신기하게 내가 쓴 글이 뭐였는지 묘사하니까 다들 기억했다.


 글 얘기도 하고, 수업 얘기도 하다가 근처 카페에 가서 지하철 첫차가 뜰 때까지 죽치고 앉아 있었다. 함께 있었던 최후 3인은 얼굴도, 이름도, 지망 분야도 모두 생각난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번호를 교환하지 않고 헤어졌다. 아마 다 같은 마음이었겠지. 현직에 간다면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라는.

매거진의 이전글 하나만 알아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