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내가 기억을 하는 순간부터 본인은 내가 10살이 되면 자살할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 얘기를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내내 들었다.
불행했던 그녀를 이해는 한다. 26살에 나를 낳았다.
그때 남편은 감옥에 가 있었다. 남편이 몇 달 안 가 출소했지만,
나까지 세 식구가 방에 똑바로 누울 수 없어서 나를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봐야 했다고 한다.
아빠는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었다고 했다.
아빠의 입에서 '행복'이라는 말이 나온 건 그때가 유일했다.
아빠의 행복은 얼마나 갔을지 모르겠다.
엄마는 내가 태어난 지 2년이 안 되어 동생을 낳았고, 다시 2년이 안 되어 막내를 낳았다.
예쁘고 날씬하던 엄마는 70킬로가 넘는 뚱보가 되었고 우울증에 걸렸다.
남편은 뚱뚱한 몸에 대해 매일같이, 본인은 장난이랍시고, 지적을 했다.
얼마 안 가 시부모를 모시고 살면서 그녀는 불행이 극에 달했다.
나는 매일 불행한 엄마를 보면서 숨죽이고 살았다. 그게 5살때다.
어느 날 아빠가 술을 먹고 행패를 부렸다. 할머니 머리 끄댕이를 잡고 있는 걸 내가 본 것 같다.
엄마는 코뼈가 부러졌다.
할머니는 그날 이후로 매일 "너네 아빠는 뭐라구?" 하고 물었고,
그때마다 나는 "나쁜 놈이요" 하고 대답했다. 내 생각에도 나쁜 놈이 맞았다.
내가 7살이 됐을 무렵, 아빠가 돈을 많이 벌었다.
엄마는 월세를 받을 수 있는 단독 주택도 하나 가졌고, 차도 생겼고, 사모님 소리도 듣게 되었고
미운 시어머니와 떨어져서 살게 됐지만 애 셋을 기르고,
시아버지까지 모시는 건 젊은 여자에게 불행한 일이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느냐"라고 매일 소리를 질렀다.
이것이 대충 어릴적 엄마의 모습이다. 아, 뭐 내가 성인이 되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기의 기분만으로도 버거웠던 엄마가 애 셋의 마음을 일일이 알아줄 리도 없다.
나는 회피형으로 자랐다. 어쩌면 공포회피형일 수도 있다.
엄마는 삶이 너무 버거웠으므로 아이들이 말을 잘 안 듣거나 의사소통이 잘 안 되면 때렸다.
"엄마 내 분홍 원피스 어딨어?" "거기 장롱에 봐" "어디?" "왼쪽에 봐" "없어"
그러면 엄마는 성질이 나서 달려와 나를 때리는 식이었다.
나는 20대 후반까지도 뭘 찾으려 할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최장 5시간 반을 맞아봤는데 다칠 정도로 때린 것도 아니고 살살 때렸지만
분위기 자체가 무서웠기 때문에 나는 내내 엉엉 울고,
너무 지쳐서 시계를 흘끗 보면서 맞은 시간을 계산해 봤더니 5시간 반이 지나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이던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라는 책을 읽었다.
처음에 펑펑 울면서 읽었고, 중학교 1학년 때까지 도합 3번 정도 읽었다.
당시에는 그 책이 내 인생 책이었던 것 같다.
너무 오래 전이라 내용이 기억이 나진 않지만,
제제가 매를 맞는 것=학대로 여겨졌고
그리고 나도 바로 그 학대당하는 아이인 것 같아서 가슴을 치며 울었던 것 같다.
물론 회피형 인간답게 '내가 학대 당했다'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어떤 어렴풋한 슬픔만이 나를 강타했고
그리고 그런 슬픔이 수치스러웠던것 같다.
자살하고 싶은 그녀 밑에서 나는 나를 수치스러워하며 자랐다.
뚱뚱한 엄마가 창피했다. 매일 소리를 지르는 그녀가 창피했다.
술 먹고 행패부리는 아빠가 창피했고, 매일 인슐린 주사를 배에 놓는 할아버지도 창피했다.
엄마 말에 따르면 또라이인 할머니도 창피했고, 나를 남 보듯 차갑게 바라보는 고모도 창피했다.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이룬 것이었으므로 나도 창피했다.
왜 나까지 수치스러웠는지는 모르겠다.
엄마든 아빠든 남 깎아내리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무의식 중에 그렇게 됐을지도 모르겠고.
나는 다행히 공부를 잘했다. 날 때부터 잘해서 공부를 안 해도 전교 1등을 했다.
수치스러운 나는 공부잘하는 아이로 포장이 되어 그럭저럭 학교 생활을 했다.
회피형 인간은 완벽한 인간을 연기한다는데,
나는 연기했다기보다 먼저 포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