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문

2화. 회의적인 회의

by Sonia


외근을 마치고 복귀하자마자 소연은 회의실로 호출됐다.


- 소연님 301 회의실로 와요. 다들 모였어요.

- 네네 금방 갈게요.


상무님 스케줄 변동으로 회의 시간이 당겨진 모양이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부터 화장실에 가고 싶었지만 소연은 회의실로 바로 들어갔다. 브랜드의 하반기 웹사이트 디자인 리뉴얼 관련 회의였다. 제일 끝자리 화면 맞은편에 앉은 상무가 한마디 던졌다.


- 저는 a, b안 둘 다 이전보다 좋은 것 같습니다. 사실 나는 브랜드 타깃이 아니기 때문에 디자인 관련해서는 여러분의 의견이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각 팀에서 의견 부탁드립니다.


역시 상무는 달랐다. 그는 늘 전략적으로 꼭 필요한 부분은 언급하지만 그 외의 부분은 담당에게 맡겼다. 담당의 전문성을 존중하는 느낌. 소연은 그럴 때마다 더 큰 책임감과 힘을 얻었다.


- 글쎄요, 저는 a안은 색감이 너무 튀지 않나 싶어요. 저희 브랜드와 맞지 않는 것 같은데요. b안은… 괜찮은데 뭔가 힘이 없는 느낌이랄까?


1팀 팀장이 말했다.


- 저도 그런 것 같아요. a안은 컬러감이 세서 제품이 묻히는 느낌이에요.


2팀 팀장이 거들었다. 지난번 회의에서는 컬러가 더 잘 보였으면 좋겠다고 해놓고는 이번에는 튄다고? 소연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다른 의견들을 물었다. 매번 느끼지만 회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임원진 앞에서 자신만의 날카로운 시각을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이라도 있는 듯 뭔가를 지적하기에 바빴다. 그에 비해 근거는 미미했다. 특히 디자인 분야는 더 그랬다. 복잡한 숫자도 아니고 누구나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에 마치 너도 나도 전문가인 양 쉽게 한 마디씩 덧붙였다.


- 음, 저는 a 안이 예쁜 것 같아요.


3팀 팀장이 말했다. 40대 남성인 그는 브랜드의 타깃도 아니었다. 뚜렷한 근거도 없이 그저 본인의 취향을 말하는 그를 보며 소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난 일주일간 소연은 오늘의 회의를 위해 몰두해 왔다. 브랜드의 결에 맞는 선에서 컬러 스펙트럼을 펼쳐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브랜드 방향성, 제품 비주얼에 미칠 영향, 가독성 등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관련 담당들의 의견을 취합해 여러 부서에서 납득할 만한 안으로 다듬고 또 다듬었다. 예쁘고 안 예쁘고로 판단할 디자인이 아니었다. 그렇게 만든 결과물이 회의실 안에서 문구점 스케치북 표지로 전락하는 것 같았다.


어떤 회의에서는 아무도 이견을 내지 않는다. 대표나 상무가 먼저 하나를 콕 찍어 좋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시각을 뽐내는 의견들은 온데간데없고 회의는 순식간에 웃으며 마무리된다. 이런 식의 회의를 매번 겪다 보니 소연은 소신대로 밀고 나가야 할 것과 반영해야 할 것을 구분하는 노하우가 생겼다. 영업, 마케팅 전략과 관련된 근거 있는 수정 요청이라면 반영. 그저 개인의 취향을 말하는 의견이라면 웃으며 듣고 한 귀로 흘린다.

어릴 때는 납득이 안 되는 수정 요청에 화도 많이 났지만, 이제는 담담하게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끌고 나간다. 나름의 요령이 생긴 것이다. 자신도 남도 납득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요령.


그럼에도 이런 회의가 회의적으로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설득해도 안 되어서 요청대로 수정하면 이전 시안이 더 좋았다고 할 때도 있고, 지난주 회의 때 냈던 본인의 의견조차 기억 못 하는 이들도 있다.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업무량이 많은 건 견딜 만하지만, 이런 상황들을 마주할 때면 힘이 빠진다.

문득 퇴사한 옛 선배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 그거 견디는 값이 월급이야.


그런가. 하기사 하고 싶은 대로 하려면 회사원이 아니라 아티스트를 했어야지. 대기업의 타이틀과 수입의 안정성을 위해 프리랜서로 한두 건 일하다 입사했던 13년 전. 그때의 선택이 맞았던 걸까?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 같다. 13년이라는 세월 동안 개성이 뚜렷한 아티스트들은 더 귀한 대우를 받게 되었고 회사원의 정년은 짧아졌다.


회의를 마치고 자리에 돌아온 소연의 표정을 보고 상황을 단번에 알아챈 옆자리 유진이 메신저를 보냈다.


- 소연님, 잠깐 커피 어때요?


유진은 요즘 소연이 가장 마음으로 의지하는 사람이다. 둘은 각자의 텀블러를 한 손에 쥐고 복도를 걸어 나간다.


- 회의 분위기 어땠어요? 통과됐어요?

- 아니, 다음 주까지 지난번과 이번 보고의 중간 정도의 새로운 안을 만들어야 될 거 같아요.

- 진짜? 또 어떤 새로운 안을 해야 하는 거예요?

- 그냥 뭐.. 다시 하면 돼요.

- 맞아. 까짓 거 다시 해주면 되져모.


키가 큰 유진은 소연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웃는다.

소연도 회의 다녀온 사이 조금 더 충혈된 듯한 유진의 눈을 보며 찡긋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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