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문

6화. 용기 없는 자들의 대화

by Sonia

집에서 빈둥대며 보낸 휴가는 눈 깜짝할 새 가버렸다. 아직 몸이 회복된 느낌은 아니지만 복귀일을 더 미룰 수가 없었다. 사무실은 여전하다. 겨우 1주일 쉬었는데 메일함에는 용량 초과 경고가 떴다. 다시 아파질 것 같은 독촉 메일들을 흐린 눈으로 읽어 가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본다. 사원증을 목에 걸고 힘없이 앉은 모습. 노비패를 건 노비 같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한때 취준생들이 입사하고 싶어 하는 기업으로 뽑혔던 회사인데 여기 이렇게 월급 받고 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나. 소연은 한숨을 쉬다 모니터 속 자신과 눈이 마주친다. 그 얼굴이 왠지 낯설다.


- 소연 님 휴가 잘 다녀왔어요?


메신저가 떴다.


- 그냥 집에서 쉬었어요.


- 오늘 점심 약속 없으면 나 지훈 님이랑 먹는데 같이 먹을래요?


- 그래요.


점심시간. 오랜만에 성은, 지훈과 마주 앉았다. 회사에서 가장 무해하고 성실한 사람들. 평소의 소연이라면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었겠지만 오늘은 기운이 없다. 아무리 친하다 한들 회사에서는 속내를 꺼내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도 자꾸 불쑥불쑥 속내가 튀어나온다.


- 나는 회사밖에 모르고 살았는데 요즘 바깥세상이 궁금하더라고요.


- 왜 있잖아, 우리 파트 선배였던 승현 님. 요즘 프리랜서로 잘 나가더라.


지훈이 말했다.


- 맞다, 영업 파트 동훈 님은 건강식 브랜드 창업해서 대통령상까지 받았대요.


성은도 거들었다.


소연은 그보다 더 많은 퇴사자들의 소식을 알고 있지만 입을 다물었다.

문득 어릴 적 복덕방 할아버지들이 떠올랐다. 지인들 큰돈 번 얘기를 늘어놓다가 과자 부스러기를 털며 일어서던 뒷모습. 본인 이야기는 없으니 남의 얘기만 실컷 하고 헛헛하게 돌아가던 그 모습이 어린 소연의 눈에도 참 안돼 보였었다. 이 상황에서 그 장면이 왜 떠오르지. 소연은 그 장면이 떠오른 이유를 굳이 파고들지 않았다.


- 참 우리 회사 사람들은 스펙도 좋고 능력도 좋은데.. 사업의 시스템을 너무 잘 알아버려서 그런가. 용기 내서 자기만의 무언가에 도전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회사가 우리를 성장시키는 건지 퇴화시키는 건지 모르겠어.


- 응?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휴가 때 무슨 일 있었어요?


성은이 소연을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물었다.


- 문득 궁금하더라고요. 내가 회사를 나가게 된다면 나는 어떤 사람일까.


소연은 테이블 위의 물 잔을 바라봤다.


- 명함에서 회사 이름이랑 직급 다 지우고, ‘김소연’만 남으면. 그때의 나는 뭘 할 수 있을까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 아니 근데… 우리 여기서 이렇게 버틴 것도 대단한 거예요. 요즘 신입도 안 뽑잖아. 10년 이상 근속하는 게 쉬운 게 아니라고.


지훈이 먼저 입을 뗐다.


- 맞아, 버티는 게 일이지.


성은도 고개를 끄덕였다.


- 근데 뭘 위해서 버티는 건지 모르겠어요. 요즘 같아선 성장하는 느낌도 없고, 더 참고 다닌다 해도 정년보장도 없고. 정말 월급만 남은 것 같아.


소연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지훈이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아. 나도 가끔 그런 생각해. 근데 난 애가 둘인데 와이프한테 갑자기 그만두고 다른 거 해본다고 하면..


- 그렇지, 현실이 그렇지.


소연은 두 사람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는 게 보였다. 행여 심란하게 만든 건 아닌지 마음이 쓰여 얼른 화제를 돌렸다.


- 근데 혹시 그거 들었어요? 이번 인센티브 생각보다 잘 나온대요.


순식간에 두 사람의 얼굴이 환해졌다.


소연은 회사에 도는 소문 몇 가지를 늘어놓으며 가까스로 점심시간을 밝게 마무리했다. 동료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 편안하지만 결론은 늘 똑같다. 다들 머리로는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도 누구도 이 회전문을 박차고 나가지 않는다. 그렇기에 오늘도 우리는 여기 있다.


퇴근길.

외주 업체 사장님이 소연에게 인사를 건넨다. 소연보다 한참은 높은 연배인데 소연 앞에서 허리가 펴진 적이 없다. 소연은 이제 익숙하지만 명함 없는 김소연을 상상하니 문득 이 상황이 불편해진다.


- 사장님, 이번 제품 꼼꼼하게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 소연이 허리를 굽히자 사장님은 두 번 세 번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고 말한다.


- 아입니다 아입니다, 맡겨주셔서 감사하지요.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사장님은 소연이 멀어질 때까지 허리를 굽힌 채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소연은 걸음을 재촉해 회전문으로 향했다. 지하철을 타려다 피곤해서 대로변에서 택시를 잡으려 손을 들었다. 양옆으로도 손을 휘젓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래서는 집에 늦겠다 싶어 다시 지하철로 방향을 틀었다.


- 소연님, 집에 가세요?


- 까만 세단이 소연 앞에 멈춰 선다. 좀 전의 업체 사장님이다.


- 아,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 어느 방향이세요? 제가 같은 방향이면 태워다 드릴게요.


- 아니에요, 저 지하철 타야 빨라요.


소연은 도망치듯 뒷걸음질 쳤다.

파리도 미끄러질 듯 반들반들한 까만 세단이 사장님과 함께 사라진다. 소연은 그 차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 회사에서 늘 같은 공장 점퍼에 허리 굽히고 인사만 하던 분이 회전문 밖에서는 근사한 사장님이 된다. 그에 반해 회사 안에서 트렌디한 차림으로 또각또각 걷던 고연차 대기업 사원 김소연은 회전문을 나오는 순간 그냥 평범한 워킹맘일 뿐이다.


그래, 이게 나야. 착각하지 말자.

소연은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갔다.

이 회사에 다닌다는 자부심으로 꽤 잘 나가는 양 착각했던 시절이 부끄럽다. 무엇이 트리거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집에서 빈둥대며 보낸 휴가는 눈 깜짝할 새 가버렸다. 아직 몸이 회복된 느낌은 아니지만 복귀일을 더 미룰 수가 없었다. 사무실은 여전하다. 겨우 1주일 쉬었는데 메일함에는 용량 초과 경고가 떴다. 다시 아파질 것 같은 독촉 메일들을 흐린 눈으로 읽어 가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본다. 사원증을 목에 걸고 힘없이 앉은 모습. 노비패를 건 노비 같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한때 취준생들이 입사하고 싶어 하는 기업으로 뽑혔던 회사인데 여기 이렇게 월급 받고 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나. 소연은 한숨을 쉬다 모니터 속 자신과 눈이 마주친다. 그 얼굴이 왠지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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