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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영 Mar 16. 2016

수업 중에 딴짓

오늘 수업이 너무 지겨워서 이야기보따리를 한번 풀어본다. 오늘 아침부터 내 머릿속을 맴돌던 것들을 개연성 없이 나열해보려고 한다.

1. 우리집 가훈은 궁불실의 달불이도(한자로 써야하는데 한자를 모른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가난해도 의를 잃지 말고 불의의 상황에서도 도를 지키라는 말이었던 것 같다. 21세기를 조선시대 선비처럼 사셨던 우리 할아버지의 대쪽 같은 성격이 그대로 묻어나는 말이다. 초등학교 때에는 학교에서 가족신문을 만들면서 가훈을 적어오라고 하면 읽지도 못하는 한문으로 된 가훈을 적어 가는게 좀 부끄러웠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사랑, 소망, 평화”같은 쌈박한 가훈을 적어 오는데 왜 우리 집 가훈은 이렇게 길고 어려운 건지 이해가 안갔다. 엄마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면 엄마는 그래도 우리 가족은 저 가훈을 항상 가슴속에 새기면서 살기 때문에 그 어느 가훈보다 의미있는 거라며 반박할 수 없는 설명을 해주곤 했다. 
2. 우리 가족(엄마, 아빠, 나, 동생)은 짭쪼롬한 근검절약 정신이 몸에 배어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쥐꼬리만한 아빠의 교사월급으로 우리 네 가족이 나름 남들한테 가난한 티 안내고 살아온 건 대단한 일이다. 어렸을 때에는 친구들이 다니는 학원이나 입고 다니는 옷들을 왜 나는 누릴 수 없는지 궁금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 마다 아빠는 선생님 딸이 학원을 다니는 건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에 나는 학원을 안보내는 거라고 이야기했고, 엄마는 엄마 어렸을 적 한번 산 옷을 구멍이 나면 자투리 천을 덧대어 가며 이모들에게 물려 입혔던 이야기를 하며 불필요한 것들에 사치를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 그럴싸한 설명들에 세뇌되어 대체로 나는 우리집의 경제적 부족함을 많이는 느끼지 못하고 자랐다. 현 시대의 정의에 빗대어 말하자면 우리집은 흙수저지만, 고고한 흙수저다.
3. 취직을 하고나서 일년도 안되어 내 월급은 아빠의 몇십호봉 월급을 넘어섰었다. 옛날보다 지금은 우리 가족도 조금은 여유가 생겼지만, 그래도 여전히 남들에 비해 넉넉하지 못하고 일생 아껴씀이 몸에 배인 우리는 큰 돈이 있어도 쓰는 법을 모른다. 4월에 외할머니와의 유럽 여행을 계획하며 엄마는 그동안 모아 놓은 돈도 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자린고비처럼 아껴가며 여행하지 않겠다며 큰소리를 떵떵 쳤다. 그런 엄마가 하는 최고의 사치란 하룻밤 십오만원 정도짜리 호텔을 예약하는 것과 한끼 식사에 인당 오만원 정도 예산을 잡는 것. 내가 아직 돈을 벌고 있었더라면 출장다니면서 잤던 호화로운 호텔에 우리 엄마아빠도 한번 재워주고 싶다만 나도 지금은 한달에 사백유로도 안되는 생활비로 손가락을 빨며 살고 있어 고작 별점과 후기를 토대로 가성비가 가장 좋은 호텔을 골라주는 것에서 그쳐야만 했다. 
4. 나는 대학 진학 이후로는 등록금도 생활비도 부모님의 손을 빌리지 않고 경제적으로 독립한 것이 굉장한 효도라고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엄마 아빠는 내가 내리는 삶의 결정들에 다른 부모님들보다 간섭을 덜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우리 아빠는 본인은 아직도 부모님의 생활비를 다달이 챙겨드림에도 불구하고 요즘 시대의 세련된 부모님들이 그러하듯 퇴직 후에는 자식의 손을 빌리지 않고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퇴직연금이 적으면 택시기사를 하겠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한다. 오늘 문득, 언젠가 우리 아빠 엄마는 딸래미가 스물여덟 정도 되면 결혼도 하고, 취직해서 부모님 용돈도 챙겨드리고, 곧 손주도 보여주지 않을까를 꿈꿨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이렇게 시집도 안가고 타지에서 공부하겠다고 앉아있으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년 정도 일을 하면서 나는 취직선물과 생일선물 말고는 엄마 아빠에게 용돈을 드린 적도 없고, 가족 여행 한 두번 돈을 내는 것으로 효도를 퉁쳤다. 엄마 아빠는 정말 열심히 살았지만 여전히 고만고만한 월급에 고만고만하게 살고있다 생각하니, 실컷 잘 키워놓은 딸이 아직도 부모님 인생 역전을 시켜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다음에 다시 돈을 벌게 되면 엄마 아빠 용돈은 적게라도 꼭 챙겨드려야겠다. 
5. 신라면의 인기는 대단하다. 파리에서 가장 많이 본 한국 음식이 있다면 그건 바로 신라면. 왠만한 아시아 사람들은 모두 신라면을 부엌에 하나씩 구비하고 있다. 나는 라면을 안 좋아해서 한국에선 내 돈주고 라면을 사먹은 적이 손에 꼽을 정도지만 요즘은 가끔 소주에 라면이 너무 먹고싶을 때가 있다. 
6. 또 내가 굳이 즐겨먹지 않는 음식을 꼽으라면 칼국수인데, 칼국수는 가족 외식을 할 때 마다 아빠가 범어동에 있는 칼국수집에 가기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 칼국수집은 아빠가 이십년이 넘게 다니는 단골집인데 할머니와 할머니 딸인 또다른 할머니가 매일 국수를 삶으신다. 건물주가 집세를 올려 그 집이 지난 주에 문을 닫게 되었는데, 아빠한테 연락을 해서 문닫기 전에 국수 한번 삶아줄 테니 오라고 하셨단다. 엄마 아빠는 그 집의 마지막 칼국수를 먹으며 나한테 영상통화를 걸었고, 자다 깨 받은 전화였지만 가슴이 짠했다. 나는 칼국수를 싫어해서 늘 새알미역국이나 비빔국수나 수육을 시켜 할머니들을 귀찮게 해드렸었다. 
7. 혼자있는 시간이면 종종 할아버지가 보고싶다. 우리 할아버지는 의성 김가 족보를 거의 외우다시피 하시고, 늘 내가 의성 김가의 무슨 할배(까먹었다) 37대 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하셨다. 한번도 빠짐없이 할아버지 집에 가면 우리는 큰절로 인사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 나와 내 동생은 할아버지가 그토록 주장하는 예대(존댓말)를 한번도 한 적이 없다. 할아버지의 표현에 빗대자면 돌쌍놈들이다. 잘 웃지도 않으시고 늘 딱딱한 이야기만 하셔서 언뜻 보면 친근해 보이진 않으셨지만 나는 내가 할아버지와 가장 친한 손녀였다고 생각한다. 나와 내 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한테 장기와 종경도 놀이를 배우고, 윷놀이를 할 때에도 윷자리 하나하나의 한자 이름을 읊으며 말을 두었다. 할아버지가 연적에 담긴 물을 벼루에 부어 직접 갈아주는 먹으로 할아버지한테 서예를 배웠고, 생일이나 어린이날에는 빠지지 않고 할아버지가 붓으로 첫 장에 직접 쓴 편지가 있는 책을 한 권씩 선물 받았다. 다른 친척들이 머리 염색을 하거나 찢어진 청바지나 짧은 치마를 입고 나타나면 불같이 화를 내셨지만 나와 내 동생에게는 신기하게도 완곡한 타이름에 그쳤다. 할아버지는 자식들과 손주들의 사진부터 시작하여 작은 물건 하나도 버리지 않고 가지런히 정리를 하여 모아두셨다. 나와 내 동생이 장난으로 만든 찰흙 도자기와 십자수, 여행 다닐 때 마다 하나씩 사다드린 작은 기념품들은 할아버지 방 책꽂이에 아직도 정갈하게 놓여있다.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나의 모든 졸업식엔 할아버지가 한복두루마기와 중절모를 쓰시고 오셨었는데, 내년 대학원 졸업식엔 할아버지가 없을 생각을 하니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다. 
8. 아 이렇게 많이 썼는데 아직도 수업이 안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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