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 1년차의 구직기
전 세계를 누비며 살고 싶었다. 어려서부터 집에는 지구본이 있었고, 엄마는 말버릇처럼 우리 딸은 커서 세계 일주를 꼭 하라고, 세계 일주가 마치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인 듯한 말투로 이야기하곤 했다. 지금 하고 있는 공부는 엄마와 내가 함께 꿈꾸던 노마드의 삶을 실천하기에 딱 맞다. 용감해지고 싶을 때에는 개발 도상국에 가서 필드 일을 하면 되고, 도시와 자본주의의 단 맛이 그리울 때에는 언제든 돌아와 NGO의 헤드쿼터나 컨설팅 펌에서 일을 하면 된다. 일의 특성상 사람을 뽑을 때에 국적에도 제한이 없을뿐더러 WHO가 굳이 아니더라도 UN 산하 다른 국제 기구 (UNODC, WFO, UNDP, 등)이 수두룩 하고, 거기에다 적십자사를 비롯한 각종 NGO들과 대학 연구소, 정부부처, 국가 및 사설 연구 재단을 모두 합치면 전 세계에 나의 잠정적 일터가 흩뿌려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 거다.
기회의 땅에 드디어 발을 내딛은 지금, 별안간 나는 어디서 무엇을 (누구와) 하고 살아야 하는지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석사 과정에서는 2년의 수학 과정 간 총 2번의 인턴십을 할 수 있다. 아니 해야 한다. 첫번째 해의 인턴쉽은 최고 3-4달까지 가능하고, 두번째 해의 인턴십은 6개월 이상을 필수로 해야하며 석사 졸업 논문을 쓸 수 있는 분야여야 한다. 첫 번째 인턴십은 나의 오랜 소원이었던 필드 경험을 쌓는데 중점을 맞추기로 했다. 물론 중점과는 상관없이 스무여개가 넘는 잠정적 일자리들로 이력서를 넣었다. 서당개도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HR에서 3년넘게 일하면서 한번도 채용 담당이 된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옆에서 읽어내린 이력서들과 주워들은 인터뷰들이 있었기에 나름 구직에는 자신이 있었다. 1월부터 시작된 장장 4개월에 걸친 구직활동이 마무리 된 타이밍에 내가 노렸던 일자리들을 (붙은 것들 위주로) 정리해보았다.
1. 파스퇴르 연구소 (l'institut Pasteur)
프랑스에 본사를 둔 파스퇴르 연구소는 초기 나의 첫 희망 직장이었다. 기초 생명과학 연구 뿐만 아니라 보건과 관련된 연구들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고, 불어권 국가를 중심으로 전세계에 지사를 두고 있으며 프랑스에서는 국경없는 의사회와 적십자사와 더불어 이 분야의 가장 권위있는 기관으로 손꼽힌다. 나는 불어를 하는 아프리카 국가로 가고 싶어 아프리카에 있는 파스퇴르 연구소들 5-6군데에 원서를 넣었다. 인터뷰를 하여 최종합격을 한 곳은 코트디부아르 지사. 하지만 처음 오퍼를 줄 때 약속했던 숙소 제공이 무산되고 비자를 받기 위해 맞아야하는 백신들이 너무 많아 고민하던 중 연구소가 있는 도시에 폭탄 테러가 나면서 주변의 만류와 의욕의 감소로 할 수 없이 오퍼를 고사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불어 면접을 본 연구소였고, 개발도상국의 각종 질병들과 관련된 데이터들을 다룰 수 있었기 때문에 거절하면서도 참 아쉬웠던 포지션이다.
2. 국제백신연구소 (IVI)
학부 첫 지도교수님이 연구소장으로 계셔서 알게 된 국제백신연구소는 WHO 산하 유일하게 백신의 연구,개발,배포를 중점으로 다루는 비영리기관이다. 서울대 캠퍼스 안에 위치하고 있어 한국이 그리웠던 나에게 딱 맞는 직장이다 싶었고, 동남아와 아프리카 등지 등의 개발 도상국에 스테이션을 둔 프로젝트들이 많으며, 유럽과 미국 유수 대학 및 연구소들과 긴밀하게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간 크게 현재 연구소장으로 계시는 하버드대 박사 출신 한국계 미국인 아저씨에게 이메일을 보냈더니 관련부서 부서장과 인터뷰를 할 수 있게 연결을 시켜주셨다. 다른 좋은 기회들이 생겨 올해에는 일을 못하게 되었지만 내년 인턴십이나 혹은 졸업 후 직장 (몇년 정도 한국에 살고 싶어진다면)으로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할 곳이다.
3. UNODC
여기는 UN 중에서도 약물오남용 및 범죄를 중점적으로 담당하는 곳이다. UN 잡 포스팅이 올라와있는 리스트에서 보고 무심결에 지원했는데 운좋게 합격을 하였다. 여기를 선택했더라면 비엔나에 있는 헤드쿼터에서 일을 하게 될 거였지만 "무급"이라는 UN인턴의 치명적인 단점과 비싼 유럽 국가의 수도라는 근무지의 조합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기에 정중히 거절했다. 내가 제안받은 분야는 개발도상국들을 중심으로 한 전세계 50여개 국가의 어린이 및 청소년 약물 오남용에 관한 데이터에서 인사이트를 뽑아내는 일과, 관련된 국제 회의 등의 주최를 돕는 일이었다. UNODC는 학기 말에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 분야 중 하나인 난민과 장기,인신매매 등과 관련된 국제 범죄들 역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비엔나는 소싯적 배낭여행 하던 시절에 내가 손에 꼽던 가장 아름다운 도시이기도 해 꼭 살아보고 싶었지만, 현실은 돈.
4. 세계보건기구 (WHO)
국제보건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해보고 싶은 꿈의 직장! 여러 경로를 통하여 지원해본 결과 나의 결론은 WHO인턴은 일반 지원자 경로를 통하여서는 왠만해서는 합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일반 지원 링크와, 교수님 추천으로 인한 직접 컨택, 그리고 내가 찾아낸 관심 분야 및 관심 국가 담당자들에게 직접 뿌린 이력서 등 총 3가지 경로를 통하여 각기 다른 WHO 오피스들에 지원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첫번째 경로 빼고는 다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최종적으로 오퍼를 받은 곳은 지역사무국(Regional Office) 2곳과 국가사무국(Country Office) 2곳. 두 종류 다 장단점이 있다. 지역사무국은 소위 말하는 화이트 칼라의 일을 하기 때문에 선망의 대상이 되기 쉽다. 국제기구에서 하는 일을 큰 시각으로 보기에는 스위스의 본사나 지역 사무국이 알맞다. 하지만 국가 사무소에서 일을 할 경우 인턴에게 주어지는 책임감과 자율성이 더 크고, 여러 프로젝트에 유동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지역 사무소에서 보내주지 않는 필드 트립도 보내준다는 점과, 개발 도상국의 경우 그 나라 정부 보건복지부와 긴밀하게 협력하는 프로젝트들이 많다는 점이 매력이다. 처음에는 남미권 국가에도 가보고 싶었고, 아프리카에도 가보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가면 갈수록 한국 근처에서 여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커져 최종 결정은 캄보디아 지역사무소 전염병 유닛 (Communicable Disease Unit)으로 결정했다.
5. 그 외
국제기구나 구호활동에 딱히 관심이 없다면, 혹은 좀 더 데이터를 본격적으로 다루어보고 싶거나 정성적인 연구(Qualitative Research)를 해보고 싶다면 대학교 연구실에서의 인턴도 나쁘지 않다. 나도 초기에는 질병역학 연구실에서의 인턴을 고민했었지만 첫 해는 필드로 나가고 싶다는 마음이 컸기 때문에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프랑스어를 할 줄 안다면 파리 안에도 적십자사(CR), 국경없는 의사회(MsF), 에피센터(Epicentre), 파스퇴르 연구소(Institut Pasteur) 등의 각종 기관들의 헤드쿼터 혹은 국가 사무소가 많기 때문에 오피스잡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다. 미국에서 좋은 국제보건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콜럼비아 대학이나 예일, 하버드 혹은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등에도 관심있는 분야를 연구하는 교수님이 있다면 이메일을 보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실제로 우리 대학에 강연을 하러 왔던 몇몇 교수님은 학생들 중 몇명을 인턴으로 받아주거나 혹은 다른 동료 교수에게 추천해주기도 했다.
사실 이 "국제보건"이라는 학문은 경계가 없다. 직장인처럼 정장을 입고 하는 오피스 일에서부터 재난현장이나 오지에 뛰어들어 일하는 필드잡까지, 혹은 심리학이나 사회학에서 파생된 정성적 연구부터 통계프로그램으로 코딩을 해 분석하는 정량적 연구까지 마음만 먹으면 전세계 어느 곳 어떤 분야에서도 일을 할 수 있다는게 이 전공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다. 열정은 물론 중요하지만 전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열린 기회이니만큼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이력서도 중요하고, 인맥도 중요하고, 무엇보다도 어느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성이 있으면 남들보다 두발짝 앞서나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보통 질병역학 연구에서는 의사들이나 생물학자들을 선호하고, 통계 프로그램을 다룰 줄 알면 매우 유리하다. 사회행동학 분야의 연구에서는 심리학이나 인류학 등을 전공한 사람들을 선호하고, 설문조사나 인터뷰 등을 이용한 정성적 연구를 해 본 경험이 있으면 유리하다. 마지막으로 그 어느 분야건 상관없이 경쟁력에 큰 힘을 보태어주는 것은 언어 능력이다. 영어는 물로 기본이고, 대부분의 국제기관들이나 연구소들이 다른 외국어를 하나 더 할 것을 요구한다. 나의 경우 어느 정도 불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플러스로 작용한 경우가 많았고, 반대로 스페인어를 못하기 때문에 남미쪽에서는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된 경우도 있었다. (내년에는 꼭 스페인어를 배워야지) 불어나 스페인어 중 하나를 할 수 있으면 가장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특정 나라나 지역에 관심이 있다면 그 지역에서 통용되는 언어를 할 줄 안다면 파견 근무를 제안하는 곳들이 줄을 설 것이다. (힌디, 스와힐리어, 아랍어, 인니어 등)
그래서, 난 5월 둘째주부터 WHO 캄보디아 국가 사무소 인턴으로 3개월간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국의 학생들, 의사선생님들, 청년들 중 나와 같은 꿈을 꾸는 친구들이 있다면 이 글이 언젠가는 작게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관중은 없지만 글은 일단 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