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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예슬 Oct 28. 2018

마침표


하나의 사랑이 끝났을 때 우리가 그토록 괴로운 이유는, 좋았던 날들의 기억만이 마음 속에 억울한 색으로 번져들기 때문이다. 그를 처음 사랑하게 된 날로 거슬러 올라가 그와의 시간들을 곱씹어 본다. 그가 날 보고 지어주었던 미소, 한없이 사랑스러운 온도로 어루만져 주던 손길, 둘만 알고 있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날들에 미리 점을 찍어 두었던 숱한 약속들. 그 모든 것들이 하나 하나 차례대로 마음을 콕콕 찔러오면 '아, 그렇게 나를 사랑해 주었는데' 싶은 생각에 지금 이 현실이 좀처럼 납득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이별은 아프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이별이 주는 아픔에 성숙하게 마주하는 법은, 그와의 '처음'이 아닌 '끝'을 기억하는 것이다. 어떤 관계든 좋은 시절을 곱씹어보면, 저마다 색과 향은 다르겠지만 그것이 주는 느낌. 애틋하고 아름다웠던 그 느낌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한창 사랑할 때는 내 모습을 포기해 가면서까지 상대방에게 마음을 쏟기 때문에, 그 때의 모습으로 상대방을 추억하고 그 때의 사랑에 미련을 갖는 건, 엔딩 크레딧까지 다 끝나버린 영화관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별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빨리 씻어내고 싶다면- 우리가 한창 사랑했을 때가 아닌, 우리 관계가 끊어졌을 때. 그때 그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자. 그때 그의 표정, 그가 내뱉은 말들을 꼭꼭 씹어내어 현실을 받아들이면 쓸데없는 미련 혹은 의미 없는 망상 따위에 가려져있던 인연의 끝을 똑바로 볼 수 있게 된다.


이별의 여운에 잠겨있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사랑에 더 이상의 에너지를 허비하기에 나는 그간 충분히 나를 홀대했다. 그만하면 되었다. 사랑과 이별, 그 일련의 과정 속에서 한층 더 성숙해진 내 모습을 대견해 하며. 사랑을 그저 좋으면 갖고 싫증나면 버리는 하나의 놀이로 여기는 사람이 아닌, 그를 통해 스스로를 알아가고 내면을 더 귀하게 채워나갈 줄 아는 사람과, 조금은 더 책임감 있고 깊이 있는 사랑을 새롭게 할 수 있을 때까지 그 에너지를 간직해두고 싶다.


또 하나의 사랑이 이렇게 지나간다.

고생했다. 너도,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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