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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나무 Mar 04. 2021

내 책상 위의 매력포인트

수입은 줄고 시간은 많아져서 하는 일들 - 문구 만들기

문제를 맞혀보세요

소니 워크맨, 애플 매킨토시, 포스트잇 노트 중에 가장 먼저 판매된 것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이 글의 맨 끝에)




기억력 챔피언인 '타티아나 쿨리'라는 사람은 평소 머리를 비우고 산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인정했다. "난 포스트잇 덕분에 살아요". 얼마 전 읽은 <문구의 모험>에 나온 글이다.


이 책의 챕터 '냉장고 문에 붙은 하이퍼텍스트'엔 이런 글도 있다.


포스트잇의 매력은 단순하다. 그것은 우리가 기억하도록 도와준다. 
포스트잇은 사무실에서든 집에서든 똑같이 쓸모 있다. 시각적인 환기 장치로서.
한번 쓰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변한다.
윌 셀프는 <가디언>지에서 자신의 글쓰기 과정을 설명했다. 자기 책의 "생애는 공책에서 시작되며 그다음에는 포스트잇으로 옮겨가고, 포스트잇이 방의 벽에 붙여진다"는 것이다. 글이 완성되면 셀프는 포스트잇을 벽에서 떼어내 스크랩북에 보관한다.
뉴욕 현대미술관 큐레이터인 파올라 안토넬리는 2004년 <소박한 걸작품> 전시회에 포스트잇을 전시 품목에 포함시키고 그것을 "냉장고 문에 붙은 하이퍼텍스트"라고 묘사했다. 



메모가 작품이 된 전시

감독 스탠리 큐브릭의 메모를 전시했던 서울시립미술관 (2016년)



메모지와 포스트잇에 대해 매력적으로 소개한 글을 보고 있자니, 2016년에 다녀온 스탠리 큐브릭 전시도 생각이 났다. 작은 수첩을 들고 다니며 메모를 하는 습관이 있던 스탠리는 자신의 취향에 꼭 맞는 것을 찾기 위해 수첩회사에 연락해 모든 종류의 수첩을 받아보고 어떤 걸 쓸지 결정했다고 한다. 


나도 내 취향에 꼭 맞는, '매일 쓰고 싶어 지는' 메모지를 가져야 겠다는 강렬한 욕망에 휩싸였다. 당장 교보문고 핫트랙스로 달려갔다. 10-20대의 친구들이 북적북적한 그곳엔 당연하게도 30대 취향을 고려한 문구코너는 찾기 힘들었다. (이건 30대 취향이야 라고 우긴다면 그런 것들도 많지만) 10,20대를 위한 블링블링한 문구와 너무 진지하게 생겨먹은 몰스킨 같은 고가의 문구류 그 중간쯤 나의 취향이 있는 것 같은데 매의 눈으로 찾아봐도 딱 내가 쓰고 싶은 메모지 하나가 없었다.


예전에 종종 애용하던 o-check라는 브랜드의 문구코너도 찾아봤다. 단독 코너가 있을 만큼 잘 나갔는데 코너는 사라지고 여러 공책과 뒤섞여 있었다. 요즘은 사업이 잘 안되는지 종류도 줄고 저가를 공략한 공책과 세일 상품만 있어서 건질 게 없었다. 결국 메모지는 못 사고 아쉬운 마음에 펜 몇 자루와 마스킹 테이프를 사왔다. (분명 300원짜리 모나미를 산거 같은데...  17,000원어치 라니!!) 


몇개 안 집었는데 17000원어치나 샀다. - 영수증 일기


집에 오자마자 메모패드를 만들었다. 아니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을 한참 뒤져 공시생과 수험생을 위한 떡메모지 중에 적당한 것들을 골라낼 수도 있었는데 그 시간에 그냥 만들어 버리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하나를 만들고 나니 세트 욕심이 나서 결국 3종류나 만들었다. 좋아하는 색으로 포인트를 넣고, 연한 그리드에도 각각의 다른 색을 넣어 디자인했다. 출력본을 인쇄소에 넘기고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 딱 3일이 걸렸다.  



실물을 받아보니 훨씬 예쁘다! 


copyright. 2021. padori mungu


copyright. 2021. padori mungu



새 메모지에 오늘 날짜를 적고 해야 할 일을 적었다. 적다 보니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는데, 나는 그 모든 할 일을 제치고 고작 메모지 하나를 만들어서 포장하고 있네? 잠시 찬물을 끼얹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돈 벌 시간에 돈 안되고 쓸데없는 짓 한다'라고 말할 사람들. 아니 말 안 해도 표정으로 말하는 사람들까지. (예를 들면 우리 회사 사장님에게) "저 문구 만드는 게 취미인데요?"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무튼 나는 새 메모지에 다음에 만들고 싶은 문구류 들을 적어보았다.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도 적고, 오늘 먹을 저녁 메뉴도 적었다. 냉장고에 들어있는 식재료들도 적어서 붙여놓는다. 


인스타그램에 메모지를 만들었다고 알리니, 펜과 종이를 애용하는 몇몇의 친구들이 쪽지를 보내왔다. 멀리 있는 친구에겐 우편으로 보내주기로 약속하고, 곧 만날 친구들에게는 포장한 걸 선물했다. 메모지를 포장할 비닐도 있었지만 안보는 잡지를 재활용 해서 만들었다. 문구점에 가면 고작 2-3천 원에 살 하찮은 물건이지만, 친구는 귀한 선물인양 소중하게 챙겨가고 매우 기뻐했다. 기뻐하는 친구를 보니 나도 뿌듯하다. 



<메모지를 포장하며>


누군가의 생각에 물을 주는 역할을 하는 메모지 하나로 그의 삶이 조금 더 촉촉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케아 잡지로 포장한 메모지


<아무튼, 메모>의 저자 정혜윤 PD는 메모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생각하는 시간을 자신에게 선물하는 거라고 얘기한다. 그리고선 메모를 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혼자 있는 시간에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서. 

그런 방식으로 살면서 세상에 찌들지 않고, 

심하게 훼손되지 않고, 내 삶을 살기 위해서." 






요즘 나의 메모지 활용은 이렇다.


1. 투두 리스트 / 체크리스트

투두 리스트로서의 기록인데, 실제로 해야 할 일만 적는 게 아니라 했던 일이나 아이디어 같은 것 모두를 그 날짜에 적어놓는다. 어느 날은 1장만 쓰고, 어떤 날은 3장을 쓰기도 한다. 메모지에 적은 것들은 다시 노트로 옮겨지기도 하고, 또다시 메모지로 옮겨지기도 한다.

*데일리 로그는 불렛 저널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해보면 다양한 활용도가 나온다.



2. 우리 집 시그니처 메뉴판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왔다. 그들에게 뭐를 해줘도 다 맛있게 잘 먹어줄 거라는 걸 알지만, 그날 그 장소에서, 그 시간에 딱 먹고 싶은 음식은 다르다. 냉장고 속에 있는 재료들을 생각해 만들 수 있는 요리 리스트를 적어서 주었다. 메모지가 메뉴판이 되었다.


그들은 각자 먹고 싶은 메뉴들을 골랐다. 친구들은 이 방법에 매우 흡족해했다.



3. 생각이라는 씨앗에 물 주기

평소와 다른 신호를 주는 기억의 조각들이 있다. 그 조각은 단어 하나, 문장 하나일 때가 많다. 대부분 정보의 공해 속에 휩쓸려 나의 소중한 시그널을 찾지 못하고 잃어버린다. 그럴 때면 허탈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만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 


그럴 때면 메모지에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적어둔다. 강력하게 기억하고 싶은 의지가 있다면 책상 앞에 붙여놓거나, 아니면 메모 상자에 넣어둔다. 씨앗을 심듯 종이에 글을 적어두고 햇볕에 가만히 두고 잠시 다른 일을 한다. 다시 메모로 돌아오면 신기하게도 다음 이어질 말들이 술술 적힐 때가 있다. (*주의: 매번 그런것은 아님 ㅎㅎ)



앞으로 만들 문구류를 보여 줄 포트폴리오 개념으로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에 등록했다. 아직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황무지 같은 곳인데 혹시 메모지가 필요한 분이 있을까 싶어 링크를 걸어둔다. 

'브런치에서 봤어요' 라고 배송메시지에 적어주시면 특별한 포장과 내가 가진 스티커들을 함께 넣어보내드리고 싶다. 파도리 문구 






정답

소니 워크맨. 

이 문제는 미국 TV 프로그램 <밀리언 달러 머니 드롭>에 나온 문제라고 한다. 참가자들은 그중에 가장 먼저 판매된 것으로 모두 포스트잇이라고 대답했지만 틀렸다고 판정받았다. 정답은 워크맨. 워크맨은 1979년, 포스트잇은 1980년, 매킨토시는 1984년에 나왔다.

- 책 <문구의 모험>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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