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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나무 Mar 10. 2021

1. 퇴사를 하고 바다로 갔다.

딱 한 달만 살고 돌아오려고 했는데



이제 막 퇴사를 한 가난한 서른두살에게 가장 필요한 건 뭘까?

1번  |  2번 이직 | 3번 바다


소설 <모비딕>의 저자 허먼 벨빌도 궁금해한다.

굳세고 건강한 신체에 굳세고 건강한 정신을 가진 청년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한 번쯤은 바다에 가고 싶어 안달하는 이유는 뭘까?


나도 몹시 궁금하다! 그런데 이 대목을 읽으니 2016년 겨울, 5년 전의 마음이 고스란히 떠올랐고, 그때를 회상하느라 책을 덮고 그 날의 일기장을 펼쳤다.



바다에서의 해방체험


제주도로 늦은 여름휴가를 홀로 떠나던 때였다. 9월이라 해수욕장은 이미 폐장이었지만 바다에는 서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충동적으로 입문 강습을 받고 바다에 들어갔다. 그날 바다에 6시간이나 떠 있었다. 피부가 다 벗겨지고 빨갛게 부어올랐다. 3박 4일 휴가 중 나머지 이틀은 아파서 숙소에 누워 지냈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마어마한 해방감 같은 기분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날부터였다. 하루 종일 바다 생각만 났다. 처음으로 보드 위에 올랐던 순간이 머릿속에서 무한반복 플레이되었다. 마치 상사병 걸린 사람처럼. 그러다 한 서핑 샾 사장님이 다음 달에 한 달 동안 발리에 간다고 한다. 발리는 365일 파도가 치는 곳인데 매일 서핑하려면 체력을 잘 키워나야 한다고 했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너도 갈래?"라고 물었다. 그 말은 내 마음을 결정하는 방아쇠 같은 말이었다.


'내가 가도 되는 거야?' '매일 서핑하는 삶은 어떤 삶일까?' '그 삶이 내 것이 되어도 괜찮은 걸까?'

그곳에 한 달이나 지내려면 돈이 많이 들겠지.. 근데 매일 파도를 타는 삶이라니!! 와- 미쳤다.



발리에서 한달동안 서핑해볼래?”


미쳤다. 뭔가 씐 사람처럼 홀리듯이 11년 동안 몸담은 곳에 퇴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발리로 가는 티켓을 끊었다. 한 달 후 돌아오는 일정으로.


평생을 뭘 좋아하는지, 뭘 원하는지 긴가민가 하면서 살았는데 이렇게 강력하게 하고 싶은 일이 생기는 게 기적이 아니고 뭔가!


떠나기 전날까지 한 달 넘는 시간 동안 정신없이 일을 하고, 인수인계를 하고 눈떠보니 발리로 가는 비행기 안이였다. 그때 한국은 겨울, 발리는 우기였다. 공항에 도착하니 훅- 하고 들어오는 습하고 더운 바람이 폐 속으로 들어왔다. 이게 발리 냄새구나. 우기라 그런지 비가 오지 않아도 비릿한 비 냄새가 났다.


발리를 도착한 다음날 새벽에 일어났고, 바다로 갔다. 그러고보니 퇴사 후에도 굉장히 부지런한 삶을 살았다. 새벽 5시에 일어나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차에 보드를 싣고 바다로 갔다. 나의 출근지는 도시 빌딩이 아니라 발리의 동쪽 바다가 되었다.


눈뜨면 바다로 가고, 한낮의 따뜻한 햇빛을 잔뜩 먹고, 그 햇볕으로 데워진 물에 몸을 적시고, 저녁엔 노을을 보고, 밤이 되면 달과 별을 보며 잠들었다. 그 외에는 특별히 한 일은 없다. 관광지도 가지 않고, 맛집을 찾아다니지도 않았다. 그때 알았다. 하루가 충만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미 만족스럽다는 걸.






“젊을 때 빚내서 놀아야 된다는 말 몰라?”


3주가 후딱 지나갔고, 서핑을 배우기엔 한 달은 너무 짧았다. 주저하지 않고 유효기간이 6개월인 비행기표를 가장 늦게 돌아갈 수 있는 날로 연장했다. 매일 줄어드는 날짜에 조마조마했는데, 이제 5개월이 남았다고 생각하니까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 사이 더더욱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에 익숙해졌다. 책도 읽지 않았고, 넷플릭스도 보지 않았다. 뉴스도 보지 않았고, 당연히 일도 하지 않았다. 서핑 실력을 늘리기 위해 가끔 지상훈련을 하긴 했지만 그것도 열심히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마음이 조급하지 않았다.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한국에선 일을 안 하고, 돈을 안 벌면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 취급을 하기에 아무것도 안 했다는 말은 한국식 표현인 셈이다. 나는 종종 해변에서 맥주를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러 갔다.


이제 5개월 남았으니 앞으로 살 집을 구하러 다녔다. 한 달에 23만 원 하는 장기 월세방(꼬스)을 구했다. 바이크도 빌렸다. 3개월 빌리는데 12만 원인가 했던 것 같다. 어느새 가방엔 옷보다 비키니가 더 많아졌고, 내 몸에는 태양이 지나간 흔적으로 흰색이었던 다리가 갈색이 되었다.


리프가 있는 바다에서 서핑하다 보니 긁히고 찢어진 상처가 생겼다. 서핑하다 다친 상처는 영광의 훈장이다. 크게 안다친게 다행이다. 운동선수처럼 매일 서핑하고 한 끼에 2인분씩 먹으니 몸에 근육이 붙는다. 근육이 생기니 이제야 조금 서핑이란 게 뭔지 알듯 말 듯 했다.


발리에 몇년 째 살고 있는 언니가 말했다. "젊을 때 빚내서 놀아야 한다는 말 몰라?" 처음 듣는 말인데 살면서 이렇게 공감되는 말은 처음이다.


그러고보니 30대는 놀기에 딱 좋은 나이다. 적당히 자기만의 취향이 있고, 체력이 있고,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해도 괜찮은 나이. 그런데 그 언니의 말을 다시 떠올려보니 40대도 놀기에 딱 좋은 나이인것 같다. 아마 50이 되어도 같은 생각을 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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