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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나무 Mar 13. 2021

2. 서핑을 하면서 직업을 얻었다.

취미가 서핑이라고 했더니 면접에 통과했다

서핑하면서 만난 친구들은 시대에 뒤쳐지는 질문은 대체로 안 한다. (직장은? 나이는? 결혼은? 애는?) 오히려 매뉴얼대로 살아온 사람들이 해명할 것이 많다. 왜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면서 직장을 오래 다녔는지? 왜 결혼을 하는지? 어떻게 아이를 낳을 대단한 결심을 하게 됐는지? 앞으로 계속 서핑하려면 어떤 일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서울을 떠나 바다로 갈 수 있는지 등등


이 중에서 서퍼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단연, 지속 가능한 서핑하는 삶이다. 파도를 매일 타려면 우선 매일 파도가 들어오는 곳이나 꽤 자주 들어오는 곳에 살아야 하고, 돈벌이와 시간과 체력, 그리고 동반자(가 있다면)의 동의도 필요하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갖춰져도 실력은 별개의 문제다. 서핑은 어려워도 너무 어렵다.


초급 딱지를 뗀 이후에도 몹쓸 몸뚱이는 좀처럼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나름 운동신경이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것 또한 나의 재능 없음을 알게 해 주었다. 뭐 언제는 재능이 있었나. 재능 없다고 괴로워하기에 나만 손해다. 그런다고 없는 재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쳇. 꼭 잘하는 일에만 도전해야 하나. 못하니까 도전이지.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햇볕을 마음껏 쬘 수 있다는 것 하나는 참 좋았다. 길바닥 위에서 쬐는 햇볕보다 바다 위에서 맞는 햇볕은 100배는 상쾌하다. 햇볕을 많이 보고 자란 식물이 중력의 힘을 거슬러 하늘을 향해 쭉쭉 자라고 줄기도 두꺼워지는 것처럼, 나도 중력의 힘을 거슬러 마음이 젊어지는 것 같고 단단해졌다. 그렇게 이 바다 저 바다를 떠돌며 이런 파도 저런 파도 타다 보니 어느덧 발리에 온 지 5개월이 지날 즈음이었다.



파도가 없는 날에도 바디 서핑




이제 선택의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내 앞에는 두 가지 길이 놓여있다.


원하지 않는 출근을 평생 대출금을 갚으며 일을 하고, 결혼하고  낳고 살던가 아니면 서핑을 하기 위해  삶을 전면적으로 개편하거나. 물론  중간 즈음 적당히 서핑하고, 적당히 원하는 일을 하는 길도 있지만 그것 또한 서핑에 대한 엄청난 열정이 꾸준히 샘솟아야만 유지 가능한 일이다.


아무튼 한번 물맛을 봐서 그런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서핑하기 전의 나와 이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서핑이 뭐길래 그게 내 삶의 우선순위 차트를 갈아엎고, 어느새 1번이 되어 있다니. 이제 나의 관심사는 딱 하나다. 오늘 하는 서핑을 내일도 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즈음, 옆방 사는 친구가 디자인을 해보는  어떻겠냐고 권했다. 그녀는 디자이너였고, 한국에서 디자인 일을 가져와 틈틈이 일하며 발리에 살고 있었다. 처음 발리에 가려고 결심했을  서핑샾 사장님의 "너도 갈래?"라는 말에 이어 "너도 할래?"라는 말에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그날부터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시작했다.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았고, 미술에 대한 기초지식도 없었지만 나는 디지털노마드가 되어야만 했다. 그래야 서핑을 계속할 수 있으니까. 그 일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이후로는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없을까 갈팡질팡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시간에 이력서 하나라도 더 전송해야 했다.


놀라운 실행력에 부스터 역할을 해준 최고 기여는 통장잔고였다. 마침내 전재산은 30만 원!! 이미 지난 6개월 동안 퇴직금과 월세 보증금까지 다 털어 썼다. 그러고 보니 서핑은 마약과 도박이랑 비슷하다. 애비애미도 눈에 안 뵈고 중독돼서 전재산을 탕진한다는 점에서.


다행히 도박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서핑은 정신건강에 무척 이롭다는 거다. 매일 파도와 싸우면서 맷집이 생겼는지 통장이 줄어도 인생에 뒷걸음 칠하는 느낌은 안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선 단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다시 서핑하기 위해 발리로 언제 돌아올 수 있을까. 이제 현실과의 싸움이다.


그렇게 한국에 오자마자 (보증금도  썼으니) 부모님 집의 창고 방에 신세를 지고, 당장 카페 알바를 시작했다. 3개월 만에 포트폴리오를 일단 완성하고, 디자인 관련 일을 구하기 시작했다. 내가   있는 모든 디자인 분야에  지원했다. 어차피 나에겐 전공 따윈 없으니까. 이제  일을 하면  전공이 되는 거지 .


처음 몇 주는 연락이 없더니 어느 날 디자인 회사에서 면접을 볼 수 있냐고 연락이 왔다. 출근은 웬만하면 피하고 싶었는데 1년에 6개월 정도 프로젝트가 있을 때만 출근하면 된다고 해서 면접을 보러 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실장님이 나에게 취미가 뭐냐고 물었고, 나는 주저 없이 "서핑"이라고 했다. 며칠 후 출근하라는 연락이 왔다. 이후에 실장님이 나를 뽑은 이유에 대해서 말했다.


"왠지 서핑한다고 하니까 놀기도 잘 놀고 일도 잘할 것 같잖아."


운이 좋은 건가 ㅎㅎ

서핑 덕에 일을 구했다. 아주 효자야 이 녀석.


아무튼 우연히 서핑을 했더니, 새로운 직업을 얻었다. 새 친구들도 생겼다. 그중에서 영혼의 동반자도 만났다. 본격적으로 서핑 예찬 글을 써야 할 것 같다. 나도 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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