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평생 한 음식만 먹을 수 있다면? 나는 템페를 먹겠어요
콩과 효모로 빚어낸 인도네시아 전통음식이다. 청국장, 낫토와 더불어 세계 3대 발효식품이라고 한다.
가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면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질문이다. 이 음식만 평생 먹고 살 수 있을까? 템페를 만나기 전엔 마늘과 파스타면과 소금만으로 담백하게 볶은 '알리오 올리오'였고, 최근엔 다시마 두장이 들어간 오동통면에 조금 흔들리기도 했었는데, 다시 마음을 굳혔다. 나는 템페를 먹을 것이다. 평생.
까다로운 입맛으로 엄마를 힘들게 한 얄미운 꼬맹이(=나)는 지독한 편식쟁이였다. 어릴 때 사진을 보면 잔뜩 일그러진 표정에 볼이 빵빵한 꼬마가 있는데, 그 꼬마는 유치원 선생님이 억지로 먹인 시금치를 30분 동안 입안에 다람쥐처럼 넣고 있다가 결국 뱉었다고 한다.
입 주변이 까맣게 묻어서 지저분해 보이는 짜장면도 먹지 않았고, 빨간 고춧가루가 이상하게도 비위에 맞지 않아 김치뿐만 아니라 고춧가루가 들어간 모든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렇다고 야채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하여간 안 먹는 거 투성인 꼬마가 손꼽히게 좋아한 음식은 콩이었다.
밥에 물 말아 짭쪼롬한 간장에 조린 콩자반과 한술 뜨고, 다져진 야채들과 계란물을 입힌 두부는 나의 최애 반찬이었다. 된장찌개와 청국장도 사랑했다. 아침마다 낫토를 먹기도 했다. 나를 콩순이라 놀려도 할말이 없을만큼 콩을 좋아한다. 콩밥은 별로 안좋아하지만.
그 꼬마는 무럭무럭 자라 마법처럼 편식이 사라졌고, 대부분의 음식을 다 잘 먹게되었다. 그러다 서른 즈음, 발리에서 템페를 처음 만난다. 한식부페처럼 밥과 반찬을 골라서 먹을 수 있는 짬뿌르 와룽(식당)에서.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인데 굉장히 익숙한 맛이 나는 템페는 자꾸만 생각이 나더니 어느순간 나의 소울푸드가 되어 있었다.
와룽에서 파는 템페는 주로 기름에 튀기거나, 굽거나, 간장에 조리거나, 카레맛이 나는 흥건한 국물에 버무려져 있거나, 땅콩 같은 견과류들과 함께 달짝지근한 물엿으로 한데 뭉쳐져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좋아한 조리법은 그냥 담백하게 구워서 삼발마따 (sambal matah)를 얹어 먹는 것이다.
삼발 마따만 있으면 템페를 3배는 더 먹을 수 있게된다. 양파와 라임의 상큼함과 고추의 개운한 맛이 템페를 장작태우듯이 무한정 소진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템페를 밥알처럼 질리도록 먹고 또 먹었다. 맥주 안주로도 먹고 밥 반찬으로도 먹고 간식으로도 먹었다. 아무리 먹을 곳 없는 인도네시아 시골마을에 가도 템페만은 있었기에 이것은 나의 생명줄이었다.
발리에서 질릴 때까지 먹고 와서 그런지 맛있는 음식 천국인 한국에서 템페를 찾을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러다 발리에 못 간 지 1년이 지나고... 조금 떨어져 있어야 그 소중함을 안다 했던가. 내 마음속의 고향, 인도네시아의 템페가 그리웠다. 고향의 맛 템페.
홀린듯이 템페를 주문했다. 국산콩으로 템페를 만드는 곳, 파아프 템페에서 최소수량인 5봉지를 주문했다.
템페는 그냥 구워서 소금을 뿌려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맛있다. 고소하면서도 담백한데 깊은 맛과 보들보들한 콩들이 부서지는 식감까지 완벽하다. 음식의 주인공으로서 존재할 때도 맛있는데 조연의 역할을 할 때도 주인공과의 궁합이 찰떡이다. 샐러드에 토핑의 역할도 훌륭히 해내고, 샌드위치의 햄의 역할도 잘 해낸다. 말랑한 템페는 빵을 상상하면서 먹으면 빵이 되고, 방금 막 튀긴 템페를 먹으면 크런치 바가 된다.
이런 매력덩어리!
자기만의 색깔이 분명하면서도 어떤 재료와도 잘 어울리는 템페는 마치 사람으로 치면 1000년은 앞서 살아온 현자 같다. (아 좀 과한가?)
내 사랑 콩 패밀리들을 잠시 소환해 템페와 비교해보자. (비교해서 미안해. 너희들도 다 맛있어)
두부는 너무 물컹해서 씹는 즐거움과 포만감이 부족하고, 청국장은 맛과 향이 너무 강력해서 매일 먹긴 부담스럽다. 된장찌개도 밥이 있어야 같이 먹을 수 있고, 낫토는 실이 너무 많이 나와서 누군가 같이 먹을 땐 왠지 눈치가 보인다. (늘어진 실을 침으로 오해하는건 아니겠지 하는 그런 걱정)
콩 패밀리들의 공통점은 그 재료 하나 만으로 먹기에 아쉬운 느낌이 든다는 거다. 하지만 템페는 그것 그대로 메인과 서브의 역할을 모두 충실히 해낸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굳이 시도해 보지 않았지만, 찌개에 넣어먹고, 카레에 넣어먹어도 훌륭히 자기의 역할을 해낼 녀석이다. 흠- 이쯤 되면 템페와 어울리지 않을 재료를 찾기가 더 어렵지 않을까.
이 세가지만 기억해도 템페를 즐기기엔 충분하지만 템페의 변주를 즐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올리브 오일에 마늘을 구운 후 템페를 같이 구워보자. 그 위에 바질도 올려보자. 보자보자 어디보자 소스도 만들어 볼까? 홀그레인2 : 마요네즈1에 라임을 살짝 뿌려서 섞은 후 템페를 푹 찍어 먹어보자. 흠. 맥주를 꺼내올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