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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나무 Jan 18. 2021

10년 간의 자취방 연대기

월세방에서 길어올린 기본소득제 이야기


8살 어린이의 꿈은 독립이었다. 부끄러움과 생각이 많은 꼬마는 혼자있는 걸 좋아했다. 그 꿈은 22살에 이루게 되었다. 10년 동안 7번의 이사를 했고, 꼬박 월세를 벌고 월세를 내느라 내내 버거웠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나의 선택이니 기꺼이 불안과 자유를 함께 얻었다.

언젠가는 또 이삿짐을 싸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가구는 사지 않았다. 없이 살다보니 사는데 가구가 꼭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았고, 서울의 월세를 감당하느라 좀처럼 물건을 사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미니멀 라이프의 삶을 살게 되었다. (사람마다 미니멀 라이프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적은 비용으로 오랜 시간을 홀로 살다보면 '사는데 정말 많은 돈이 필요할까?' '나는 얼마 만큼의 돈을 벌면 만족하며 살까?' '내가 원하는 집은 어떤 공간일까?' 여러 자취방을 옮겨다니면서 수없이 그려보았다.



 첫번째집.

 대흥동, 언덕 꼭대기에 있는 8평투룸

 보증금 200만원 / 월세 30만원


서울에 계신 부모님은 22살 성인의 독립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하던 곳이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굳이 월세를 버리면서 집을 나가야 할 이유가 없다는 거였다. 독립을 반대하는 유일한 이유가 돈 때문이라면, 더더욱 부모님의 말을 들을 내가 아니었다. 하루빨리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한 어른이 되고 싶었다. 필요한 보증금만 해결되면 나갈 참이었다.

엄마의 권유로 알바한 돈을 펀드에 조금씩 넣었둔게 있었는데, 100만원쯤 모였고 그로부터 1~2년쯤 지났을까.. 어느날 보니 200만원이 되어 있었다. 왜 돈이 2배나 올랐는지 잘 몰랐고, 일을 하지 않았는데 돈이 생겨서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그래도 불가능해 보였던 보증금이 생겨서 설레기도 했다.


<피터팬의 방구하기>카페에 매일 들어가 서울에 있는 저렴이 월세들을 이 잡듯이 뒤졌다.

그곳에서 내가 가진 돈, 딱 200만원짜리 월세방을 발견했다. 직거래를 하러 그 집에 찾아가는데, 언덕이 너무 가파라서 숨이 헐떡였다. 언덕 꼭대기 단층 짜리 집은 자세히 보니 기와집 같아 보이기도했다.

허름한 집에 노부부가 바로 옆방에 살고 계셨고, 대문을 같이 써야 했지만 그래도 내가 계약할 수 있는 유일한 집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이사를 결심했다.

이사를 가기 전날까지 당장 쓸 생필품들을 조금씩 챙기고, 트렁크에 옷가지들과 침낭과 담요를 넣었다. 이삿 날 집을 나서기 전에 사은품으로 받은 선풍기가 보이기에 들고나왔다. 내가 가진 유일한 가전제품이였다. 콜택시를 불러 그 집으로 향했다.


오래된 집은 먼지가 많았다. 거미와 개미도 유독 많았다. 그나마 개미가 나올 땐 바퀴벌레가 안 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친구가 재봉틀로 만들어준 커튼, 조명과 침낭, 작은 책상, 왕자행거는 내 살림살이의 전부였다.
주말엔 좋아하는 음식을 해먹고, 동네 이곳저곳을 산책했다. 나만의 산책코스 짜기라는 취미도 생겼지만, 그 당시 (구)남자친구의 데이트 폭력으로 급하게 이삿짐을 싸야만 했다.



 두번째 집.

 청운동, 50년 된 한옥

 보증금 5000만원 / 월세 50만원


첫번째 집을 인터넷에 올리자마자 수많은 문자가 왔다. 가장 먼저 찾아온 젊은 직장인이 계약했다. 20대 초반엔 100만원도 벌지 못했을 때였고, 또다시 보증금 200짜리 집을 찾는 건 불가능했다.

다행히 동료가 같이 살자고 제안해 주었다. 부모님에게 필요한 만큼의 보증금을 빌릴 수 있다고 했다. 나를 포함해 2명이 더 같이 살기로 했고 집을 보러 다녔다.


우리는 집을 볼 줄 아는 안목이 부족했고, 한옥에 대한 쓸데없는 로망이 있었으며, 방은 3개 이상, 되도록 마루가 있는 큰 집에 살고 싶어 했다. 직장에서 가까운 곳에 오래된 한옥을 찾았다. 대문 앞에 1평 남짓 되는 텃밭이 있었고, 텃밭 농사에 관심이 많았던 우리는 호박과 쌈 채소를 심을 상상을 하며 마음을 홀랑 빼앗겨 버렸다. 비록 화장실이 외부에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한옥 마루에서 매일 밤 수다를 떨며 외롭지 않은 밤을 보낸다고 생각하니 그쯤은 감수할 수 있었다.


그해 여름, 기록적인 폭우로 내 방이 물에 잠기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니, 가을밤 방문을 열면 꼽등이 7마리가 뛰어노는 걸 보기 전까지는.

아니아니, 한겨울에 변기 물이 얼어서 공용화장실로 뛰어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방의 온도는 1도였다. 보일러를 틀면 조금 나아지지만 웃풍 때문에 이불을 덮고 있어도 코가 빨개지도록 시려웠다. 어쩔 수 없이 커다란 히터를 샀고, 그 달 전기세는 38만원이 나왔다.

집에 놀러 온 친구가 배가 아프다고 화장실로 뛰어갔는데 얼음 깨는 소리가 들렸다. 초인적인 힘으로 변기의 물을 격파하고 뜨거운 물로 녹여서 볼일을 봤다고 했다. 그녀의 일화는 우리의 자취 역사에 종종 회자되었다.


같이 살던 친구 한명이 늦은 밤, 우리 집앞 텃밭에 웬 할머니 한 분이 앉아계신걸 봤다고 했다. 말을 걸어도 아무 말씀이 없다가 갑자기 사라졌다고 한다. 우리는 그 친구의 허해진 기를 걱정했고 몸보신겸 수육을 사다 나눠 먹었다. 그리고 며칠 뒤, 동네 부동산 아주머니가 이 집의 전주인에 대해 이야기 해주셨데.. 최첨단 시대에도 귀신이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다.

전 주인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나이 지긋한 지리 교수였고, 골동품들이 집안에 많았다고 한다. 단둘이서만 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큰 집을 팔고 이사한 거였다. 집 옥상에 올라가보니 정말이지 깨진 도자기들이 흩어져 있었다. 오래된 물건에는 귀신이 산다던데..

곧 월세 계약이 끝나가던 참이었다. 우리는 꼬박 2년을 살고 뿔뿔이 흩어졌다.



서까래가 운치는 있지만 거미도 살기 좋다



 세번째와 네번째 집.

 부암동, 다세대 주택

 보증금 1000만원 / 월세 38만원 / 관리비 3->5만원 인상


동거인과 살아보니 아무리 마음이 잘 맞아도 누군가와 같이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수리가 안된 한옥과 구옥은 사람이 살만한 집이 아니라는 것도 몸소 깨달았다. 그 이후로는 관리비를 내는 빌라와 오피스텔로 이사했다.

그 즈음 새로운 일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건 서핑이었는데, 자나깨나 생각이 나고 바다에 가고 싶어서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일을 그만두니 퇴직금이 생겼고, 매일 서핑을 할 수 있는 해외에서 월세 보증금까지 몽땅 다 쓰고 돌아왔다.


해외에서 돌아온 이후로는 월세에 대한 부담을 덜어보고자 한번도 살아보지 않은 지방으로 이사왔다. 30년 동안 서울에서만 살아보니 이제 모든 것들이 심드렁해졌고, 그저 한적하고 사람 적은 동네에 살면서 보증금의 압박이나 줄이고 싶었다. 물론 지방도 터미널 근처에 살려면 서울과 맞먹는 보증금과 월세가 필요하다는 걸 뒤늦게 알고 아예 외곽으로 이사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버팀목 전세자금대출 제도가 있다는 것도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을까. 전세금의 2-30%만 있어도 월세의 불안한 삶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아쉬워 해봤자 나의 20대엔 전세 보증금의 2-30%정도의 돈조차 쥐어본 적이 없다. 스쳐지나간 적은 있지만.


나의 월세 살이와 20대에 대한 이야기를 구구절절 꺼내놓은 이유는 최근 우리 사회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기본소득제에 대해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게 뭔 연결고리야? 할 수 있겠지만 기본소득제가 실행되면 한달에 3-40만원의 현금이 정기적으로 통장에 꽂힌다. 20대부터 지금까지 집 걱정을 하며 살았던 나로선 포기해야만 했던 많은 가능성들이 떠오를 수 밖에 없다.

나는 돈으로 살수 있는 능력보다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일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돈이 안되는 일을 하면 어리석은 사람 취급을 당한다. 돈을 벌어야만 '쓸모있는 인간'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아직도 무임금 노동에 대한 가치 평가는 만족할 만큼의 수준으로 올라오지 않았다.  



일의 결과가 아름답지 않아


30대엔 또다시 보증금을 벌기위해 직장에 들어가야만 했다. 일 자체로만 보면 재밌는 일이다. 무언가를 보기좋게 만드는 일이니까. 하지만 직장에서 만들어낸 일의 결과는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내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국토를 파헤치고, 더 많은 아파트를 짓고, 부동산으로 돈벌이를 하도록 부추기는 결과에 일조한다. 이 일에 대한 개인적 성취 따윈 없다. 그저 생존을 위해 하는 일이다. 물론 나의 영향력은 아주 미미하고 그 공고한 탑은 나와 상관없이 더 높이 쌓아질테니만, 나는 이 탑을 떠받치는 돌이 되고 싶진 않다.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서 한 선택이라는 점에서 나는 가끔 괴롭고, 매일 합리화한다.

정작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해야 하는 것들에게서 매일 멀어진다.

대기업에 다니는 나의 절친도 직장을 그만두고 싶어한다. 그 회사가 해내는 일의 결과가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악마처럼 변해가는 회사를 위해 자신의 젊은 시절을 다 팔고 싶지 않다고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름다운 일이라는게 있을까?"

"그러게 말이야"


또다른 친구도 신경안정제를 먹어야만 꾸역꾸역 잠이 들고, 그래야 출근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마저도 취업 전선에있는 동생들은 고용 되지 못해 어렵게 찾은 알바를 전전한다. 그 와중에 마케팅에 재능이 있는 친구는 스스로 기업가가 되어 무한 경쟁 시장에 뛰어든다.


그 친구들이 만약 조건 없이 일정금액을

'수혜'가 아닌 당연한 '권리'로

'배당'을 '정기적'으로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러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조금 덜 했을텐데.

조금 더 의미 있다고 생각 한 일을 오래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랬더라면 마음이 아픈 친구들이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경력단절의 두려움을 조금 이겨내고 아이를 가질 용기를 낼 수 있을 텐데.

가사노동을 전담해온 분들의 선택의 폭이 조금 넓어졌을 텐데.

일하다 하늘로 가버린 사람들이 최악의 노동여건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

그래서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는 일들에 대한 일의 보상이 조금 더 좋아질 수도 있을 텐데.

우리의 재능이 이익을 내는데만 이용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일하지 않는다고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시선이 조금은 달라 졌을텐데.

허망하기만 한 '완전 고용'이라는 신화 대신 '기본 소득'이 훨씬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인간의 일을 기계가 거의 다하게 되면 짤릴까봐 걱정할게 아니라

'그럼 이젠 우린 뭘 하면 되지?' 이에 대한 논의들이 활발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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