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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나무 Feb 16. 2021

예비 며느리의 첫 명절 후기

내 생애 가장 많은 식재료가 생겼다

"난 4월 바지락만 먹어. 그때가 제일 신선하거든~"

우리가 만난 지 얼마 안 되었던 4월, 짝꿍의 집에서 제철 바지락을 보내주셨다고 한다. 그는 바지락에 물만 붓고 뽀얗게 우러난 국을 끓여줬는데 그때 깨달았다. 내가 지금껏 먹어온 바지락은 바지락이 아니라 지우개를 가장한 바지락이였다는 걸. 식감만 있고 맛은 잘 안 느껴지는 그런 맛. 그런데 짝꿍이 끓여준 바지락 국은 어찌나 시원 담백하고 단맛과 감칠맛이 나는지.. 그런 신선한 맛은 처음이었다.


남해 바닷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태어난 짝꿍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미세한 후각과 미각을 소유한 예민 콧구멍&혓바닥이다. 그가 그런 섬세한 감각을 가지게 된 건 아마도 수많은 밥을 지어 먹인 어머니와 그가 어린 시절 살아온 환경의 영향이겠지? 그 비밀을 드디어 파헤칠 기회가 왔다! 우리가 함께 산 이후로 맞는 첫 명절이 온 것이다. 나는 어머니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어쩜 아들이 그렇게 신선하고 맛있는 것만 잘 찾아먹게 되었는지 알아낼 참이었다.


명절날에 늘 분주하기만 한 나의 모친과 달리 어머니는 여유가 넘치셨다. 식재료를 가득 보관할 수 있는 널찍한 공간은 물론 업소용 냉장고를 포함해 4대의 냉장고를 관리하신다. 집 앞 화분에도 야무지게 부추를 심으셨고 벌써 새싹이 나고 있었다. 어머니 취미는 논&밭 농사, 아버지 취미는 낚시.


두 분이서 살고 계시지만 9남매에서 자라온 어머니는 음식을 적게 하실 줄 모르신다. 짝꿍의 부모님을 두 번째 만났을 땐 새만금 갯벌이었는데, 우린 한밤중에 게를 잡았고 그물망에 10마리나 들어있었지만 어머니는 "아이고 오늘은 게가 별로 없네~" 하셨다. 그 이후에 언젠가 낙지를 '쪼금' 잡으셔서 보내셨는데 그 '쪼금' 잡은 낙지는 백 마리였다. 봄에는 산에서 두릅과 죽순, 고사리, 각종 나물을 캐서 냉동고에 1년 치 먹을 것들을 보관하신다. 두 분에게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에게서만 느껴지는 단단한 자부심이 있다.


반면 친정엄마는 5남매 중 넷째 외동딸로 자라 살림은 할머니와 큰 외숙모가 맡아서 하셨다. 그러다 이태원이 고향인 피자를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는데 그는 입이 몹시 짧았고, 그 덕에 엄마의 소식용 식탁은 심화 발전되었다. 명절 때 웬일로 만두를 빚었다길래 '아싸 이번에 만두 좀 싸가야지' 마음먹고 빈 통을 챙겨가면 "오늘 먹은 게 다야~" "그럼 전이랑 동그랑땡은 없어?" "오늘 먹고 남은 거 싸가" 결국 손바닥만큼 남은 전을 싸오고 다음날 먹어버리면 끝이었다.


모양이 제각각인 계란과 엄청 달고 맛있는 고구마
고사리 파스타

그랬는데!! 이번에 어머니가 싸주신 것은 2인 식구가 반년 정도는 먹을 만큼의 식량이었다. 어머니는 "먹을 거면 싸가~"라고 하시길래 요즘 엄청 비싸진 계란과 대파, 양파값을 떠올리며 "싸주세요!"라고 했고, 집에 와서 그 짐을 하나하나 풀어보니 내가 살면서 가장 많은 식재료를 가지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말린 표고와 멸치는 박스채 가져왔는데 언뜻봐도 3년치다. 냉동실이 비좁아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며 짝꿍에게 물어보았다. "이 주먹만 한 덩어리가 10개나 있는데 이건 뭐야?" "다진 마늘!" "우와 다진마늘이 엄청 많네 ㅎㅎ "


다진 마늘을 쓰려면 녹여서 작게 쪼개 놔야 하기에 냉장실에 넣었다. 그리고 다음날, 다진 마늘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마늘을 넣었던 그릇이 기억나서 그릇을 찾았더니 그 안엔 삐죽하고 탱탱한 것들이 뾰족뾰족 살아나 있었다.


"헛 이게 뭐지.."


나는 진심 내가 무언가를 냉장고에 두고 까맣게 잊어먹어서 변해버린 음식물이 아닐까 조금 두려웠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비닐봉지를 열었는데.. 세상에.

그것은 죽순이었다.

어머니가 혼자 사는 아들 해 먹으라고 1인분씩 작은 비닐에 소분해서 보내주신 거였다. 나 혼자 빵 터져서 짝꿍에게 말했다. "우리 집 냉장고에 마늘 심으면 죽순 난다 ㅋㅋㅋ"


어머니의 레시피대로 죽순에 물 붓고 데친 다음 들깨가루와 소금만 넣고 반찬 완성.

소금 툭툭 들기름 콸콸, 촵촵 무치면 나물 뚝딱.

말린 표고버섯 한 줌 넣고 팔팔 끓여 된장이랑 배추 넣고 찌개 뚝딱.


어머니가 주신 재료로 저녁 식사가 차려졌다. 들깨를 살짝만 볶아서 직접 짜오신 들기름은 묵직함이 느껴졌고, 생 표고에서는 향긋함이 밀려왔다. 예상대로 짝꿍의 섬세한 미각은 부모님의 부지런함과 신선한 재료들에서 온 것이다. 나는 그 덕을 매일 보는 중이다. 그리고 나는 매일 김 굽는 사람이 되었다.

(곱창김을 주셨는데 이것또한 줄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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