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었지만 받아들인 그 분의 가르침
(Cover Image 출처: youtube 채널 사물궁이)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햇살이 나른한 어느 오후였다.
당시 함께 협업을 하기보다는 팀원 각자 자율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그다지 소통할 일이 없는 개인주의적인 분위기의 회사였다.
아주 드물게 함께 파일을 돌려보거나 역할을 배분해야하는 공통업무가 있었고, 그 날이 그런 날이었다. 팀원 한 분이 자기가 초안 작성을 해보았다며, 코멘트를 해달라고 파일을 공유했다. 누구보다 먼저 파일을 작성하기 시작하고 내용을 채워넣은 그 분의 노고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몇몇 슬라이드는 순서를 바꾸면 읽는 사람이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메시지를 정리해 메신저로 전달했고, 말미에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인사를 덧붙였다.
그 분은 내 메시지를 읽고 잠깐 말이 없더니, 착 가라앉은 말투로 (이런 대화의 온도는 메신저에서도 다 느껴진다.) 왜 자기한테 '수고하셨다'라는 말을 하냐고 물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바보같이,
"네?"
라는 말만 간신히 타이핑했다.
그 뒤로 오래도록 쏟아진 그 분의 말을 들어보니, 팀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자신에게 (직급상 가장 높은)팀 리더조차도 '수고했다'는 말은 하지 않는데, 감히 내가 자기가 한 일에다 대고 수고를 논하냐는 것이었다. 나는 당황스러워서 등골이 설 정도였다.
"아뇨, 저는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닌데요.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낮춰서 생각하거나 무례하게 평가하려거나 하는 뜻은 전혀 없었습니다."
라고 재차 말했지만, 그 분은 완강했다. 수고했다는 웃어른에게 하는 말이 아니란다.
이런 일에 정답이 어디 있겠냐만은, 꽤 순수했던 나는 지식인과 국립국어원을 총동원해가며 "수고했습니다"라는 말을 웃어른에게 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인지를 30분 가까이 확인하고 연구했다. 사전적인 의미에서는 모르겠지만, 문화적으로, 화용론적으로 자기보다 손윗 어른에게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듯한 늬앙스의 결론이 나있었다. 자기보다 지위가 높거나 나이가 많은 어른한테는 '고생하셨다'라는 말을 써야한단다. 더 놀라운 건, 이미 이런 질문들과 논의들이 숱하게 있어왔다는 것. 비슷한 상황이 한국 곳곳에서 일어나고 많은 이들에게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뭐, 국문과를 졸업한 나도 몰랐지만 심정적인... 팩트가 그렇다는 데 어쩌겠는가. 일련의 연구 과정이 끝난 뒤 나는 한 발 물러서 기는 자세로 그 분께 사과를 구하고 앞으로는 주의하겠다고 속죄했다. 그 뒤로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수고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동갑이든, 또래이든, 엄청난 일을 했든, 고생하지 않았든, 그저 간단한 일일지라도, 무조건 '고생했다', '고생하셨다'를 쓴다. 굳이 계속 가져가지 않아도 되는 피해의식인 건 알지만, 난 진심으로 그때 뇌적, 정서적 피해를 입었던 게 분명하다.
그 분이 '수고' 대신 '고생'을 들어 얻는 만족감이 어느 정도일까, 나는 그때 정말 궁금했다.
그리고 나를 굳이 자기보다 아랫사람, 자기를 나보다 윗사람으로 정의내려야만 하는 그 사고의 틀이 불쌍했다. 인정받지 못해 걸리는 병은 크고 깊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되었던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