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말고, 회사를 이용해 먹는 방법
아는 언니와 오랜만의 긴 통화를 했다.
오랫동안 한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자신의 일을 준비하는 단계에 있는 언니였다.
퇴직하고 몇 달 안되어 코로나가 전 세계를 뒤덮는 바람에 이러쿵저러쿵 계획했던 일이 조금씩 미뤄지고, 1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아직도 이렇다 할 진전이 없다며 언니는 씁쓸해했다.
위로 한 스푼, 진심 가득으로 내가 건넨 말.
"아냐, 언니. 그래도 언니는 어느 누구의 무엇의 노예도 되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잖아. 나보다 나아."
언니는 민망해하며 "그런가..." 했다.
참으로 그러했다. 내가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걸어온 삶의 발자취는 때론 돈을 주는 누군가, 대충 어지간히 먹여 살려주는 기업의 노예가 되기 위한 준비였던 것 같이 느껴진다. 일상적으로 잘 적응하여 성실히 자라난 예비 노예들은 성공해서 많은 경우는 직장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일과 사람에 대해 기대하고, 그러다가 원했던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실체 없는 누군가에게 '이용당했다'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기업은 자고로 멤버들이 이탈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복지를 제공하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정도로만 자원을 관리하는 데에 최적화된 집단이다.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은 직장 속 한 개인을 나쁜 방향으로 변하게 만드는 존재가 그 회사의 사장도, 인사팀도, 주변 동료도 아닌 실체 없는 어떤 것일 때가 있다는 점이다. 분명 회사에서 일어나는 표면적인 사건들은 각기 다른 직무를 맡은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일을 열심히(혹은 덜 열심히) 하는 것뿐인데, 그 이면에는 성과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해 동기를 잃어가거나, 개개인의 성장에는 관심 없고 한 사람을 비용으로만 다루는, 어쩌면 개인에게는 그다지 무관심한 회사의 논리가 사람들을 비루하게 만든다.
기업에 소속이 되는 순간 피고용인은 즉시 '을'이 되고, (심지어는 소속이 되기 전 연봉계약서를 쓸 때에도 그러하다.) 고용인은 영원한 '절대 갑'으로 직장인의 인식 세계에 등판한다. 일개 평범한 개인들은 어떤 불쾌하고 무례한 일을 당하더라도, 지금을 넘기면 괜찮아지겠지, 이번 일만 잘 처리하면 인정받을 수 있겠지, 하는 희망고문으로 가스 라이팅 당하기 십상이다. 덜 불리해지기 위해 직장에 관계된 모든 관계들은 조심스러워지고, 사고와 언행은 여러 겹의 제약 속에 꾸깃꾸깃 갇히기 시작한다. 철저한 이해관계와 계산법 하에서 자발적으로 순응하고 효과적으로 군림하는 수많은 관계들을 회사는 허용하고, 동시에 이용한다.
근데, 어쩌겠는가. 당장 밥 한 끼, 계절마다 입을 옷, 매일 편안히 잠들 집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돈이 없으면 서럽기 때문에, 이런 생태에서 벗어나기를 결정하는 무대뽀, 혹은 용기를 갖는 것도 참으로 버거운 일임에 틀림없다. 회사에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서 회사를 그만두기에는 나는 너무나 지구인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말이지, 나는 생각을 조금 전환해보기로 했다.
회사가 사람을 이용하는 게 당연하다면, 사람이 회사를 이용하는 것 또한 정당하지 아니한가? 방향만 다를 뿐이지, 두 액션 모두 상당히 합법적이라는 점에서 맘에 들었고, 실제로 시도해볼 수 있는 점들이 많은 회사를 현재 다니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의 방법들이 모든 회사,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는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혹시 가능한 상황에서도 무심코 흘려보내고 있는 기회들이 있다면 참고하시고 맘껏 회사를 이용해 보시기를 추천한다.
회사를 이용하는 방법
1. 회사에서 업무 외적으로 지원하는 교육 프로그램(워크숍, 세미나, 연수 등) 지원
직무와 좀 맞지 않더라도, 연차가 어떠하든 간에, 내 능력 계발에 도움이 되거나 관심 있는 주제들이라면 내 경험치로 연결 짓는 일은 그 자체로 능력이고 스킬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본 업무에 조금 소홀하게 되는 것 같고, 추가적인 잔업이 많아지는 기분이 들 수도 있지만,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자발적으로 준비하고 참여하는 프로젝트는 절대 마이너스가 될 리 없다.
2. 회사에서 허락하는 모든 방식의 공식적인 휴가와 휴직을 눈치 보지 않고 사용
다행히도 아직 내겐 여러 종류의 휴직과 비교적 자유로이 쓸 수 있는 휴가가 있다. (그렇지 못한 독자가 있다면 심심한 애도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얼른 빨리 당장 이직하세요.)
공식적으로 선발되어 본진 외 업무 영역으로 파견되는 형식이건, 육아 휴직이건, 학위 과정을 위한 휴직이건 나는 눈치 보지 않을 참이다. 물론 나도 너무나 잘 안다. 어떤 조직에서는 이런 것들이 금기시, 혹은 죄악시된다는 것을. 어쩌면 누군가는 머리로는 알아도 실제로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읍소할 수도 있다. 특히 소규모인 그룹의 한 일원이 이탈되면 나머지 사람들이 일정 부분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된다는 걸 알기에 고심 끝에 끝끝내 실행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하지만 걱정 마시라. 당신이 없다고 해서 그 사람들 직장 생활이, 그들의 인생이 망하는 법은 없다. 회사는 필요한 자원을 필요한 시점에서 제공하고 유동적으로 관리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건 내 책임, 그리고 당신 책임이 아닐 것이다. 만일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그건 조직 관리를 못하는 회사의 책임이 명백하다. 너무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할 필요가 없는 것은 그렇게 해도 사람들이 착하다고 인정 안 해주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대출은 회사의 도움을 최대한 받되, 회사에 얽매일 정도로 안 받기
요즘 부동산이 불장이고, 또 많은 이들이 내 집 마련의 꿈을 꾸고 있으며, 나 또한 멋진 내 집에 사는 어느 날의 나를 꿈꾼다. 하나, 매매든 청약이든 집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재벌 2,3세가 아닌 이상 빚의 노예와 동의어가 아닐까 생각한다. 최소한의 삶을 위해 대출을 받는 것은 필요하지만, 욕심을 넘어서서 회사를 도저히 그만두려야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지나친 대출을 피할 작정이다. 이자 낼 돈으로 N 잡러의 길을 준비하며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정도로 내 능력치를 쌓아두는 편이 내 적성에는 더 맞을 성싶다. 대책 없이 오늘 하루만 사는 삶 같아 보이는가? 미래에 대한 대비를 안 하는 것처럼 철없어 보이는가? 맞다. 나는 미래에 대해 완벽히 대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은 하루만 사는 삶일 수도 있다. 우리 모두는.
나는 앞으로 회사 안팎에서 최대한 딴짓거리를 많이 찾아볼 참이다. 매일매일 달팽이처럼 꾸물꾸물, 집 안에서 웅크리고 있기보다는 편안한 집을 몸에서 뜯어내더라도 민달팽이처럼 가볍고 자유롭게 움직이며 탐험할 생각이다. 사람들이 너는 왜 그래? 왜 우리랑 달라?라고 뚱하게 지적하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웃고 신나게 춤을 춰 볼 생각이다. 직장에서 누군가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름다운 바람에 가깝다. 물론 호의적이고 친절한 사람들의 비율이 일정 정도로 인간 군중에 존재하지만, 그 나머지의 비율이 더 높다는 것을 언제고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심리적으로나, 실천적인 측면에서나 나는 내가 관심 가져줘야 하고, 내가 매일매일 물 뿌리고 길러야 하는 존재다. 그 결과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결국 누구의 핑계도 댈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나는 회사를 잘 이용하는 사람으로 얼마나 길지 모를 내 직장 생활을 해나가고 싶다. 어떤 회사를 다녀서 찬사를 듣는 사람보다는, 그 사람이어서, 나여서 당당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