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과 면담의 아픈 추억

능력좋은 언니야들의 좌절과 분노

by 언디 UnD

나에겐 경험적으로 친밀하며, 존재적으로 유의미한 박사님 지인이 두 분 있다.

대학원 생활, 그리고 직장 생활을 통해 내가 얻은 건 이 두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들은 혹독하고 막막한, 낯설은 환경 속에서 함께 손을 붙잡고 걸어갔던 사람들이었다.

한 때는 누구보다 가깝게 생활했지만, 시간이 흘러 헤어지게 된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이제는 나나 그들이나 다른 공간에서 살며 다른 역할을 수행하면서, 따로 시간을 내어 보지 않으면 1년에 몇번 얼굴 보기도 힘들 정도로 바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자주 연락하고 틈틈이 만나고, 같이 걸어왔던 길을 추억하며, 또 다르게 걸어가고 있는 삶의 길을 공유하고 응원하고자 시간과 노력을 쏟는 사람들이 그 두 사람이다.

내가 아는 두 사람은 굉장히 다른 성격이지만 공통점 또한 분명하다. 자기가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영역에 대해서만큼은 진심을 다해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고, 다른 사람에게 미루지 않고 자신이 맡은 역할을 감당하려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들이다. 어디에 있든 사적/공적으로 다른 이를 먼저 챙기는 선함과 호의를 가진 것도 두 사람이 비슷한 것 같다. 또, 다른 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세운 목표를 달성하는 데서 성취감과 희열을 느끼며, 성과인 결과물에 대해 다른 이에게도 인정받음으로써 집단에 소속감을 크게 느끼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열심히 건전하게 살아온 열정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네들이 생각하는 기준으로 돌아가는 공정한 세상을 기대했고, 정의로운 대우를 기다렸다.

마음 아프게도, 세상은 그리 쉽게 그녀들의 성공을 이뤄주지 않았다.


하루는 첫번째 박사님이 씌익씌익 힘든 숨을 몰아쉬며 이야기를 꺼냈다. 딱 봐도 무드가 평소와 너무 다른 걸 느낀 나는 '무슨 일이냐, 누가 괴롭히냐'고 다정하게 질문을 건넸다. 그녀는 대답했다. 고과 면담이 있었다고.


그녀는 고과 면담에서 슬픔이 아닌 억울함의 눈물이 났다고 했다.

왜? 내가 아는 한 업무에 있어서 누구보다 당당하고 자신감 있으며 부끄럽지 않게 온 힘을 쏟는 그녀가?

그녀는 고과 면담에서 자신을 변호해야만 했다고 했다. 왜 내가 이 점수보다는 더 잘 받아야 할 이유가 있는지 말이다. 그리고 상위 관리자로부터 지금 맞부닥친 부당한 상황이 변할 수 없음에 대해서 단물빠진 위로를 들어야만 했다고 했다. 상위 관리자는 위로랍시고 같은 점수 내에서는 가장 잘했다며, 조금만 더 기다려보라고 했다.


그녀는 힘이 쭉 빠졌다. 회사로부터 마음이 쿵 하고 떨어져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모든 회사의 결정에는 그네들의 논리가 있으니까, 그것이 주어지는 일의 중요도의 차이이건, 상위 직급에 대한 전관예우이건, 뭐 어떤 이유를 넣든 지저분하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말도 안되는 이유의 산물일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우연히 연락이 닿은 두번째 지인 박사님은 곧 고과 면담이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원래도 회사에 대해서 고민이 많았던 사람인 지라, 그리고 그 분이 전문성을 가지고 있지만 회사 내 다수가 아닌 소수의 위치에서 많은 업무량과 뒤치닥꺼리 성 백업을 하고 있다는 것에 큰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노파심이 먼저 들었다.

'아, 별 일이 없어야 할텐데.'


진급 예정자들을 우선으로 챙겨주곤 했던, 혹은 특정 프로젝트에 관심이 집중되곤 하는 그 회사의 특성을 잘 알기에, 아직까지도 그럴까 싶었다. 아니나다를까, 그 지인은 며칠 후에 고과 면담을 했고 똑같은 논리의 위로를 받아야만 했다. 최선을 다했고, 성과를 냈지만 다른 사람들까지 함께 고려했을 때 중간 등급의 점수는 어쩔 수 없다는 논리.

또 한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그냥 그건 감정보다 먼저 터져나온 것이겠지.


과거의 한 점에 있던 그녀가 눈치를 보고, 쩔쩔 매며, 업무 요청 뿐 아니라 다른 이의 일까지 도맡아 했을 때 기대한 것은 이런 결과는 아니었을 것이다. 본인이 하고 있던 일의 결과도 만족스러운 수준이 될 때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 했을 것이다. 기대와 다른 결과는 고문에 가까웠을 것이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은 이유 없는 결과, 혹은 근거에 반하는 결과를 납득하기가 도저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거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 "한 만큼에 대한 보상"이었다. 나는 그 말이 가리키는 일이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도 아픈 비둘기처럼 힘없이 들려서 마음이 저렸다.


그들은 이제 어떤 것에 목적을 두어야 하는지, 직장에서 결코 달성될 수 없을 거 같은 목적을 희미하게라도 두긴 해야 하는 건지, 길을 잃은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의식 속 자신과 현실의 상황의 분열을 극복하고 싶지도 않아졌을 것이다.


고과,

나는 그 단어가 참 아직도 이상하고 오묘하게 느껴진다. 모두가 목숨을 거는 그것, 그러나 정말 모두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걸까 하는 그 고과. 일전에 다른 브런치 북에서도 이직 과정에서 '고과'로 인해 어이없는 상황을 겪었던 것을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진짜 실제적으로 그게 의미하는 바가 뭘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월급의 상승? 내 능력의 순수한 인정? 다른 사람들보다 평가우위라는 객관화? 아무튼.


이 시기를 지나면서,

첫번째 박사님은 야근의 의미를 상실했다.

두번째 박사님은 생각하고 실행하지 않았던 퇴사라는 단어를 가슴 가까이로 끌어왔다.


나는 뜨겁게 달아오른 두 사람을 안아줄 수도, 껍데기처럼 위로할 수도 없어, 그저 함께 있기만 했다.


조용히 아픈 말을 건네기도 했다.

이건 전혀 새로운 일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고,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된거라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디를 바라보고 걸어야 할지.

우리가 관심을 갖고, 쏟아야 하는 것은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고.

끝끝내 우리가 지켜야할 것은 우리 자신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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