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겠고, 결론은 퇴근입니다.
회사 일을 하다 보면, 리더로부터 일상적인 업무 외에 좀 뜬금없이 요청받게 되는 일들이 있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OO에 대해서 이슈가 제기가 되었는데, 개선점이 있을지 XX님이 한번 검토해 주세요"
"직접 담당하는 사람들보다 새로운 관점으로 볼 수 있도록 의견 주세요"
갑작스러움에 비춰볼 때, 이런 경우는 대부분 그조차도 비자발적으로 전달받은 과제인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대부분 구체적인 맥락이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받은 사람 입장에서는 지시사항에 대해서 다시 한번 더 고민하게 되거나, 눈치싸움을 하게 되는 과정이 생긴다.
'OO은 원래 나와는 무관한 건데, 팀원들 중에서 내가 널럴해보여서 나한테 맡긴 건가.'
'일을 좀 더 많이 하는 척 했어야 했나...'
'검토를 하라는 건 어느 정도 선까지 구체화를 해서 제시하라는 걸까.'
'가볍게 한번 슥 봐도 되는걸까?'
....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지만, 보통 이런 일에는 깊은 생각보다는 재빠른 실행력이 요구되는 것 같아 자질구레하지 않게 핵심만 딱딱 짚어서 검토 의견을 넘겼다.
돌아온 그의 피드백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개선점을 제안하기 위해서는 해당 부서보다도 그 업무에 대해서 더 잘 알아야 한다.
(뭣도 잘 모른 거 같은데, 쉽게 제안하지 마라.)
-제안한 내용이 심도 깊은 고찰이나 데이터인지 다시 확인하라. 변경에 대한 제안은 신중히 하라. (심도 깊은 고찰이나 데이터에 기반하지 않은 상식적인 이야기 가지고는 들이대지마라.)
-제안한 특정 내용이 일면 어색해보이는데, 다른 사람 의견도 들어보자.
(내 생각엔 니가 제안한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피드백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자질구레하지 않게 핵심만 딱딱 짚으면 된다는 파악은 완전히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답정.너.
새로운 의견을 제안하라고 지시를 받는 것이, 과연 정말로 "새로운", 혹은 "개선할" 점을 이야기해도 다 수긍해주겠다는 이야기인지 난 이제 의심하게 된다. 신선한 관점으로 보라는 말은 내가 이해한 대로 꽉 채운 연구 보고서를 쓰지 않더라도, 기존의 방향과는 다르고, 현실적인 적용이 직바로 어렵다고 할지라도, 지금까지의 전제와 달라지더라도, 조금 다른 효과와 결과를 기대하며 살펴보라는 뜻이 정말 아닌 것이다. 나는 또 한번 속은 것이다.
가벼운 검토는 절대 가벼운 검토가 되어서는 안되며, 글자그대로 어리맹송하게 그 말을 믿고 진행한 것이 나의 명백한 오류였다. 기존의 논리에 하나 하나 조목조목 반박당하는 환경에서 새로운 관점과 인사이트는 눈 뜰 수 없다. 결국 적당히 가볍게 보고, 꽤 무겁게 보고, 거슬리지 않게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안하라는 것이 그가 본래 나에게 지시한 사항이었다.
난 무지했다.
나는 과연 남아서 그가 지적한 논리적인 오류들을 하나 하나 소거해가며 이 일을 완벽하게 마쳤을까?
모르겠고, 제 결론은 일단 퇴근입니다.
그렇게 나는 회사와 멀어져간다.
나는 지금도 차라리 이것이 그냥 그와 나의 개인적인 소통의 문제였기를 바란다.
내 이해력의 문제이기를, 그리고 내 눈치의 문제로 남으면 좋겠다.
이런 방식의 불통이 보편화되어 있고, 모든 날것은 깎여져야만 하는 답답한 현실이 아니길 바란다.
부디, 나같은 회사적 부적응자가 넘쳐나는 세상이 아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