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명품에 열광하는 이유
마우이는 공항부터 조금 달랐다. 젊은 커플끼리, 가족 단위로, 나이 든 분들까지 이렇게 다양하게 버글거리다니! 하와이에 온 이후로 이런 인파와 마주한 것이 처음이었기에 나는 마스크의 코 부분부터 조였다.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숨을 참게 되는 되는 두려운 시간. 한꺼번에 몰린 승객들로 인해 컨베이어 벨트는 돌아도 캐리어는 쉽사리 나오질 않는다. 어쩌면 이 시간은 가장 강렬한 기다림의 순간이 아닐까.
비행기에서 내리면 공항이 사방이 뚫려있는 오두막처럼 푸근하게 생긴 빅아일랜드와는 다르게 이곳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공항답게 생겨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익숙함에 약간의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하와이 여행에서는 렌터카가 선택이 아닌 필수이기 때문에, 공항 출구로 나오면 렌터카 표지판을 먼저 찾아야 한다. 수많은 관광객들을 상대해온 곳답게 큼지막하게 렌터카 안내 표지판이 있고, 더 놀랍게 그 뒤 도로에는 '트램'라인이 있다. 주로 유럽 여러 국가에서 경험한 기억들 때문인지 이곳에서의 트램은 굉장히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하와이 주가 미국이기는 해도 빅아일랜드에서 여정을 시작했다 보니 내심 오아후가 아닌 다른 섬들은 약간 촌스러운(?)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빠르고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준비된 교통수단을 보면서 마우이는 좀 다르게 느껴졌다. 트램을 타고 오랜 시간을 달리지 않아 렌터카 회사들로 가득한 터미널 같은 차고에 도착했다. 하늘은 참 많이 파랬고, 내 마음속에는 또 다른 기분과 기운으로 설렘이 시작되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렌터카 픽업 장소에서 만난 외국인들이 높은 비율로 오픈카 스포츠카를 빌리거나, 멋스러운 고급 외제차를 렌트한다는 점이었다. 어찌 보면 저 나이에도 운전을 할 수 있을까 싶은 백발의 노인 커플은 벤츠 오픈카를, 젊은 20대로 보이는 남녀는 머스탱을 타고 하와이의 모든 바람을 맞아들이겠다는 듯 신나게 달려갔다. 이런 장면들에서 느낀 마우이는 딱, 한 마디로 돈 열심히 벌어서 차곡차곡 모아놓은 부내 나는 본토 미국인들이 와서 휴가를 즐기며 펑펑 쓰고 가는 고급 휴양지 느낌이었다. 근데 그저 돈지랄이라고만 볼 수가 없는 게, 이 분들이 경제적인 여유만 있는 게 아니라 운전 태도에도 여유가 흘러넘치는 거다. 밝은 햇빛에 멋진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양보해주고 미소를 날려준다. 영화 속 인물 같은 그런 장면들을 눈으로 보면서 나는 운전 중에도 표정 관리를 잘해야 하는 구나를 깨달았다.
사실 렌터카는 너무도 복불복이라는 것을 마우이에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날 나는 동급의 차량 중에서 가장 안 좋은, 스마트키도 지원되지 않는 고물 닛산 차량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옆 차와 우리 차의 괴리란... 웃픈 미소가 뗘졌다. 차량 배정의 알고리즘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도착 시간이나 해당 날짜의 차량 재고에 따라 고를 수 있는 차량은 달라지는 듯했다. 한국에서도 한 15-20년 전에 타보았을 법한 단 한 대 남은 승용차를 타고 부릉부릉 첫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더 샵스 앳 와일레아. 루이뷔통, 구찌, 프라다 등 명품 브랜드 샵들이 입점되어 있는 고급 쇼핑몰이다. 내가 왜 이곳을 가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밝히지 않겠지만, 자의로 간 것은 아니고 심부름 삼아 방문을 해야만 했다. 더 샵스 앳 와일레아는 리조트들을 좌우로 끼고 있는 마우이 오른쪽 섬 남서쪽에 위치한 쇼핑몰이다. 빅아일랜드에서 봤던 고급 리조트들과 비슷하게 들어가는 입구부터 아주 잘 닦여진 도로와 널찍한 주차장이 그럴듯했다. 해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있고, 쇼핑몰 건축도 아주 아름답게 되어 있어서 한번쯤 방문해도 나쁘지 않을 곳 같았다. 빅아일랜드의 대자연에 감탄하고 끝없이 경이로움을 느꼈으면서도, 이렇게 반듯하게 잘 세워진 건물 속에서는 편안함을 느끼는 것을 보니 나는 대한민국 서울에 사는 찐 도시 사람이라는 것이 인증돼버린다. 쇼핑을 하기에 앞서서 중앙 광장에 비치된 라탄 의자에 앉아 멍을 때려본다. 햇빛은 뜨겁게 내리쬐었지만, 그늘에만 앉아도 조금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빅아일랜드보다는 확실히 체감온도가 조금 낮은 기분이었다. 공간이 변화되었음이 몸으로 느껴졌다.
사실 요즘 해외에서 명품을 산다는 것은 보통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일단 어떤 방식으로든 600$ 이상 구매를 하는 경우 관세 신고를 해야 하기 때문에 지불할 관세까지 포함하면 가격적 메리트가 없고, 600$ 이하로 구매를 한다고 해도 환율이 최고점인 시점에서는 한국에서 구매하는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다만, 국내의 명품쇼핑 광풍 때문에 오픈런이나 긴 줄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 혹은 구하기 어려운 아이템이 여행 현지에 있다거나 하는 경우에는 현지에서 구매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우이 주에서는 오아후나 미국 본토보다 세금율이 낮아서 이득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들었다. 어찌되었건 한국인에게 하와이에서의 명품 쇼핑은 관세까지 감당할 수 있는 재력을 가지고 있거나(난 얼마를 쓰든 상관없어!), 특정 명품 브랜드의 특정 제품에 대한 센싱을 아주 오랫동안 해 온 명품 마니아(대박, 난 이거 꼭 사야 돼!) 정도가 아닌 이상 해당 사항이 없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그래서 해당 사항이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을 비롯한 숱한 아시아인들이 샵마다 들러 구경을 하고 구매를 희망하는 듯한 모습을 목격하게 되는 것은 왜 때문일까.
나에게는 명품백 두 개가 있다. 하나는 10년도 더 전에 부모님께 축하 선물로 받은 구찌 쇼퍼백, 그리고 몇 년 전 직접 구매한 루이뷔통 보스턴 백. 부모님께서 내게 한 두 번 정도 중요한 이벤트 때 이렇게 명품 브랜드의 구두나 가방을 사주셨는데, 나는 사실 그 물건의 가격에 대한 인지가 거의 없었다. 별생각 없이 그 가방을 들고 참 이곳저곳 잘 사용하면서 다녔다. 내가 직접 피땀 흘려 돈을 벌기 전까지는.
첫 월급을 받았는데, 내 통장에 찍힌 돈은 20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추가로 학위 과정을 더 밟고, 나름 스펙업을 하고 또 다른 직장에 입사를 하게 되었지만, 세후 내 월급은 그다지 고가도 아닌 명품백을 겨우 살까 말까 하는 정도의 금액이었다. 근데 갑자기 억울한 거다. 내가 이 물리적으로 제약 투성이인, 낡으면 썩어지거나 끈 떨어져 버려질 물건을 하나 구입할 정도의 가치도 인정받지 못하고 회사에 내 젊음과 능력을 바치기로 계약서에 사인을 한 건가. 갑자기 내 한 달 치의 시간이 백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내가 가방 하나 지배하지 못한 기분이 들어 서운하고 가슴이 시렸다.(물론 지금은 전혀 이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그 직장에서 1년쯤 일했을 때일 거다. 어느 날 문득 다시 그 생각이 났다. 부모님의 은덕을 입어 빌붙어서 명품백을 사용해왔던 나 자신을 종말 시키고자 롯데백화점 본점으로 향했다. 그 당시 가장 눈에 들어오던 화려한 디자인의 가방을 골라 일시불로 결제를 했다. 나는 우습게도 백화점에서 가장 낮은 등급의 VIP로 승급했고, 백화점에 갈 때마다 친절한 발레 아저씨들이 내 차를 주차해주고, 빼 주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무엇일까? 그 가방은 정말, 오랫동안 내 옷장에 고이 보관되어 몇 년 간 사용되지 않았다. 워낙 눈에 띄는 디자인이기도 한 그 가방을 가끔 들고나가면 괜스레 쏟아지는 불필요한 시선과 무음 처리된 생각들이 날 훑으며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저 나쁘지만도 않은, 그러나 또 좋지만도 않은 그런 시선들 말이다. 그런 상황을 불편해하는 나 자신을 성찰하면서 나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옷장에 귀족처럼 놓여 있는 그 가방을 볼 때마다, 나는 명품 가방을 사실은 마음으로부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나에게는 그런 것이 '정말로' 필요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객기 어린 시도와 경험은 나에게 가치를 지불하는 참된 기준을 알게 해 주었다. 아무리 생각하고 고민해봐도, 명품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함이고, 독보성을 과시하기 위함이다.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이든, 사회적 지위이건, 경제적 우월함이건, 디자인적인 아름다움이건 말이다.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 명품은 재미가 없다. 그게 사람들이 명품에 열광하는 이유이다. 명품을 자랑하고 싶은 거니까. 자랑은 남들이 갖고 싶은 것을 자극하는 것이니까.
어찌 되었건 나는 이제 명품 마케팅 같은 것에는 현혹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고 자부한다. 물론 특정한 브랜드를 사랑하고, 디자인적인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사람의 부류도 있다고 생각하고 존중한다. 나도 궁극적으로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첫인상이 중요한 자리가 있으며, 고급스러운 물건을 소비하는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돈이 정말 많은 사람은 적절히 사용해 주는 것이 사회의 발전을 위해 중요하다고 본다.
물건 구매를 부탁받은 브랜드의 매장으로 들어섰다. 착 떨어지는 유니폼을 입은 스태프들이 정갈한 모습으로 인사를 건넨다. 물건 고르는 걸 도와주겠다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하는 남자는 Stephen, 그의 손목 소매 부분에 이름이 자수로 정성스럽게 새겨져 있다. 나는 이미 사야 할 물건이 정해져 있지만, 예의상 이것저것 둘러보는 척을 한다. 더 이상 필요한 게 없다고 하고 결제를 하겠다고 말한다. 이곳을 거쳐 간 한국인은 몇 명이나 될까? 이 사람들은 한국인들이 명품에 돈을 많이 쓴다고 생각할까? 나는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어떤 한국인의 모습일까? 끝까지 미소와 친절을 잃지 않는 스태프들의 환송을 받으며 매장 문을 열고 그곳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