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세상에 큰 지진이 일어날 때

살기 위해 쓸 수밖에 없는 것들

by 언디 UnD

공간과 음악 시간.

이 세 가지 만으로도 위로를, 쉼을 얻을 수 있다.

나에겐 이 세 가지가 모두 쪼달려있었다.

지금껏 몇 년 간 내가 원하지 않는 시간, 공간 속에 들어가 원하지 않는 소리를 하루 종일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관성을 깨뜨리기 위해 억지로 억지로 다른 공간을 찾아들어와 다른 시간의 색을 입히고 있다. 좋은 음악이 함께여서 다행이다.


나는 며칠 동안 심리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못했다. 너그러운 유머를 가질 여력이 없었다.

좌절을 견딜 수 있는 힘도, 모순과 상실을 잘 견딜 수 있는 힘도 없었다. 내 충동과 좌절, 희망과 절망을 인정할 수도, 고통의 쓴 맛을 줄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미친 사람처럼 절규하고, 울고, 좌절감을 폐로 맛보았다.


막다른 절벽을 마주했을 때 나는 즉각 다른 “곳”을 떠올렸다. 여기 아닌 다른 공간이 필요했다. 영화에서 장면이 바뀌듯, 다른 scene이 필요했다.

떠날 수만 있다면, 다른 행성으로 떠나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지구의 공기는 나와 맞지 않은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혔다.

그렇게 애써 적응하고자 했던 서울이라는 도시가, 더 이상 달콤한 나의 도시 속 삶이 아니라, 출퇴근과 월급 입금 문자, 회색 건물 안 생활의 연장이자 반복일 뿐이라는 생각.

자유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후회감.

머릿속의 모든 빈 공간이 매캐한 먼지로 꽉 들어찬 기분. 물론 그것은 나와 평생을 함께 하기로 한 나머지 한 사람의 탓만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남들처럼 살지 못한다는 좌절감, 그 동질감과 동류의식에서 이탈되어 떨어져 나온 것 같은 그 느낌은 강제적인 공중 낙하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도 완전히 독립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외부로부터 점화된 불행은 내 정신세계를 장악하고 최면을 걸어버렸다. 이미 늦었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누구보다 열린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믿었다. 세상에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고, 그것을 내 나름대로 조절해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자부했던 나. 인식과 대처의 유연함에 대해 자신만만해했었던 나를 완전히 뒤집어엎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설마 일어나리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 이미 상황 종료된 지도 한참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라는 존재의 전 인격은 세상에서 가장 좁은 시야와 마음으로 축소되어 버렸다. 나 스스로에게 거리를 두고 객관화를 할 수도 없었고, 이 모든 상황을 완전히 외면할 수도 없었다. 어떤 기분 나쁜 촉수가 내 정수리를 붙들고 놔주지 않는 것 같았다. 내 안에 너무 많은 것들이 순식간에 터져 나와 입을 틀어막아도 계속 안에서부터 무언가가 쏟아져 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극단의 원망조차 부족한, 그리고 이미 늦어버린, 아무 소용이 없었다. 처리되지 않는 감정으로 밤에 버티듯이 눈을 감고 아침에 눈을 떴다. 잠깐 시동이 꺼졌다가 눈을 뜨면 어제 그 악몽의 연속인 듯한 재시작.


극히 단순화된 내 고통의 원인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몇 년 간 오랜 기다림으로 품은 기대가 충족되지 않았다는 것. 손에 다 닿은 것처럼 선명했던 지점이 공중 분해된 것이다. 지난 몇 년 간의 시간과, 또한 앞으로의 같은 분량의 시간은 허공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너무 비현실적인 사건을 만나면, 갑자기 세계가 뒤흔들리는 듯한, 내가 알던 세계가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로 미시감이 크게 머리를 친다. 나 스스로와 타인, 그리고 세계 전부에 대한 불신감으로 인식에 균열의 틈이 생긴다. 나만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건지, 한편으로는 나만 이런 일을 겪는 걸까? 의구심이 든다.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원인을 찾는다. 원인이 있다면 그 원인을 예방하지 못한 대상에 대한 살기로 차오른다. 원인이 없다고 해도 이 늪에서 쉽사리 헤어 나올 수 없다. 인과가 없는 불행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상처를 받았는데, 상처를 준 사람은 없는 것과 같다. 분명히 타격을 입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유령 같은 존재가 괴롭히는 건가 하는 정신 착란이 계속될 뿐이다.


무엇이든 탓할 수 있는 대상과, 이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싶다는 생각에 결국 이른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오롯이 혼자되는 것뿐이다. 자발적으로 최종적인 고독을 선택하는 길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 알듯 말듯한 상태조차도 두려워 나는 눈물을 머금고 만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법, 기대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은 아무도 나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것이 유일한 전략이라면 살아가는 것 또한 죽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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