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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벽에 부딪치다

최대의 노력이 닿지 못한 결과를 마주했을 때

by 언디 UnD

순차통역 중간 고사를 치렀다.


시험 시간은 밤 9시30분.


수업 시간이 아닌 시간 중에 모든 수강생들이 온라인에 접속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침형 인간인 나로서는 하루가 저무는 그 즈음은 정말 너무도 힘든 시간이다.


시험 치기 전 주말부터, 긴장 속에 시험 대비를 최대한 해보려 노력했다.


스터디 파트너와 시험 주제에 맞게 텍스트를 준비해서 추가로 스터디를 진행하기도 하고,


골머리를 끙끙 앓으며 책상 앞을 지켰다.


시험 당일, 하루종일 집중이 되지 않아 마음이 힘들었다.


키우는 강아지가 오전에 갑작스럽게 수술을 하게 되어서 온 신경이 동물병원에 가 있었다.


시험을 이유로 집에 앉아서 뭐라도 해보려고 했지만, 마음이 불안하고 답답했다.


긴장이 도무지 가시지 않는 상황에서 시험 시간은 다가왔다.


순차통역은 사실 노트테이킹을 하고 첫 문장을 뱉을 때 이미 잘할 수 있을지, 없을 지가 결정이 된다.


첫 문장부터 버벅거리면서 하고 싶은 말이 아닌 다른 말이 입술에서 새어나왔다.


당황하며 느려지는 뇌와 말을 듣지 않는 혀를 붙잡고 처절하게 한꼭지 한꼭지를 뱉어가며 어떻게든 끝까지 이어나갔다.


망했다.


눈물이 왈칵 났다.


처음 통역을 시작했을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당황하고 긴장하고 준비한 만큼도 퍼포먼스가 나오지 않는 나를 즉각적으로 반추하면서 무기력감이 몰려왔다.


수치스러웠고, 굴욕적이었다.


하루종일 날 어수선하게 했던 모든 상황도, 시험 문제도, 시험 시간도, 어떠한 핑계를 대도,

잘하는 놈은 잘 했을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이 감정의 이유가 무엇인지, 근원은 어디인지, 단박에 알아차리기가 힘들었다.


내 노력에 대해 스스로 일으킨 배신이 서글픈 건지,


아니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라는 걸 인정해야하는 건지,


펑펑 울면서 엉망진창이 된 마음과 머리를 어찌할 줄도 몰라했다.


공부를 시작하고 이토록 감정적으로 무너진 건 처음인 것 같다.


통역이라는 길이 내 길이 아닌 건가 하는 의구심이 확신에 가까운 현실로 다가와 버린 것 같았다.


이만큼이나 시간을 쏟고, 지난 1년 반의 삶의 시간을 여기에 희생하다시피 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더더군다나 정말 올인이라고 할 정도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닿지 못하는 것이구나.


처음부터, 그저 운좋게 입학 해버린 것이고, 영어 실력을 최대한으로 올려보자고


가벼운 맘으로 공부를 시작했음에도, 어느순간 나는 너무 잘하고 싶어졌다.


잘하고 싶어지면 싶어질수록 마음대로 안되는 내 통역 실력이 절망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렇게 힘든 건, 그간 살아오면서 내가 들인 노력 만큼 어느 정도 기대한 결과가 나왔기 때문일까?

이 또한 나의 교만의 다른 얼굴일까?


어쩌면 2년의 통대 시간은 나에게 그렇게 결정적인 건 아닐 수도 있다.


모두가 그렇게 말했었고, 나 또한 시야가 좁아지지 않으려고 계속해서 되새기고 있는 부분이다.


이 한 번의 시험도 어쩌면 별 것 아닌 에피소드가 될 테지만.


하지만, 이 공부에 몰입하면 몰입할 수록 더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가 크게 느껴져서 괴롭다.


갑자기 모든 게 아득히 멀게만 느껴진다.


진공 같은 환경 속에서 맘편히 공부에만 집중하고 스스로 향상감을 느끼면 된다고 믿었는데,


갑자기 중력을 의식하게 된 것처럼 무겁고 답답하다.


회사에서도 일종의 실패 같은 거절감을 안고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래서 더 잘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나마 자신있다고 생각했던 게 학업 생활이었나보다. 근데 벽이 손에 느껴졌다.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은 상처받아버리고만 내가 너무 한심하고 못나서 싫다.


아무도 상처준 사람이 없건만, 내가 나를 지옥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다시 근본 질문에 부딪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이 시간을 대하는 나의 마음의 태도는 어떠한가?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이며, 어떤 것이 나 다운 선택일까?


이 질문들에 답을 내리려면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가라앉고만 싶어하는 몸을 재촉해 뭐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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