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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이를 위한 통역

일상 속 작은 깨달음

by 언디 UnD

길을 걷고 있었다. 한 현수막의 글귀가 바삐 걸어가던 나를 멈추고 다시 뒤돌아 서게 했다. 항상 스쳐 지나가던 길인데, 아마 오래 전부터 이 현수막은 설치되어 있었을텐데,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눈에 문구가 눈에 확 띄었다.

팔기 위한 고기보다
먹기 위한 고기에
최선을 다합니다.

뻔한 것 같기도하고, 어디서 보기도 한 것 같은 이 문장, 단어 하나하나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초고속 컨베이어 벨트처럼 빠르게 번쩍이고 지나가는 숏폼 영상에 익숙해진 내 뇌가 비로소 멈춰 선 내 눈에 들어온 글자의 의미를 곱씹기 시작했다. 판매하고 있는 고기의 퀄리티가 좋다는 사실을 홍보하려는 마케팅 문구였겠지만 묘한 울림이 있었다. 더 많이 팔려고, 더 큰 이익을 내기 위한 고기가 아니라 고객이 고기를 사서 집으로 돌아가 요리하고, 결국 그 고기가 입에 들어가는 순간 맛보는 사람의 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말. 쉽게 씌여진 듯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 정육점 사장님은 뭔갈 좀 아는 사람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돌아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면서 이 말을 되새김질하다보니 내가 지금 몸담고 있는 통역 분야도 매우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통역사의 입장에서 멋진 표현과 좋은 플로우로 말을 기깔나게 옮기는 것은 중요하다. 주어진 조건에서 높은 퀄리티로 완벽히 과제를 수행했을 때 통역사 자신의 만족도도 클 것이고, 누군가로부터 경탄과 찬사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통역의 궁극적 목적은 청자가 "잘 들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정말로 그러하다. 내가 연결해 주어야 할 두 주체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1순위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물론 좋은 통역사가 되기 위해 영어를 잘해야 하는 건 맞다. 하지만, 영어를 얼마나 잘하는지와 감동을 주는 통역사가 되는 것은 비슷한 이야기 같아보지만 또 굉장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통번역대학원 수업 중에도 교수님들께서는 학교에서, 또 현업에 나가서 드러나게 되는 통역사의 "인성"을 강조하시곤 한다. 유사한 다른 단어로는 "애티튜드"정도를 들 수 있겠다. 이 정육점이 이런 문장을 가게 전면에 내걸고 영업을 할 때 갖는 마음가짐처럼, 각자 마음 속에 어떤 문장 하나를 품고 있는지가 그 사람의 인성과 애티튜드로 인식되고 전달될 것이다. 내 안에는 어떤 한 문장이 뿌리를 내리고 있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어디 통역만 그러하랴.

모든 일이 그러하다. 1인칭에서 벗어나 2인칭, 혹은 3인칭으로서 타인의 관점을 중요하게 여기고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별 것 아니고 사소한 부분 같아도, 타인의 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달성하기 어려운 고난이도의 작업이다. 인간은 너무 이기적이고, 또 때로는 맹목적이다. 그렇기에 의식적, 의지적, 적극적으로 내 인지 자원을 활용하고 몸으로 부딪쳐 움직이고 훈련해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걸 두고 노력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 수 있지만, 그걸 성실하게 해내는 사람은 다른 이에게 감동을 안겨 줄 수 있다고 믿는다.


"뽐내기 위한 통역이 아니라, 소통을 위한 통역에 최선을 다합니다."

누군가가 준 작은 감동을 내가 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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