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은 나쁜 날이 아니다.
어디든 그렇지만, 특히 여행지에서는 비가 오면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관광을 하러 나가기도, 식사를 하러 멀리까지 운전하기도, 무엇으로든 이동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되거나 귀찮다. 날씨에 꽤 집착하는 나는 유난히 자주 얼굴을 찌푸리고 혼자 우울에 젖어버리는 제주의 특성이 상당히 스트레스였는데, 제주에서 태풍에, 장마에 이런저런 이유 모를 연속 비를 여러 번 만나고 나서는 체념 반, 적응 반이 되어 버렸다. 환경을 통제할 수 없으니 내가 못 이기는 척 맞춰준다고 해야 하나. 겨울이 길고 추운 나라들이 지방 함량이 높은 음식을 고안해 낸다거나, 책 읽기나 보드 게임 같은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활동들을 즐기는 것처럼 말이다.
제주에서 며칠을 지내다 보면 묘한 감각이 생기는데, 아침에 눈을 뜨면 밖으로 나가보지 않아도 날씨가 대충 예상이 된다. 큰 유리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의 색깔이나 강도가 날이 좋은 날과 그렇지 못한 날이 확연히 다르다. 온도도 비가 오거나 흐리게 되면 맑은 날과 상당히 큰 폭으로 차이가 난다. 이상하리만치, 제주에서 비가 오면 몸이 꽤 추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나는 두 가지 중 선택해야 한다. 일보 후퇴하여 실내에서 시간을 보낼 것인가, 용감하고 씩씩하게 밖으로 나가 습기와 물방울을 마주할 것인가.
사실 어느 쪽이든 그다지 큰 상관은 없다. 그 나름대로 재미와 요령을 찾기 시작하면 꽤 즐겁기까지 하다. 내 경우는 꽤 에너지가 넘치는 날은 밖으로 나간다. 옷도 대충 방수되는 잠바 하나 걸치고, 쿨한 척 현지인 흉내를 내 보는 것이다. 이까지 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제주가 그렇지 뭐! 하면서. 실제로 제주 여행을 7일 정도 계획한다면 하루도 비를 만나지 않을 확률은 드물다고 경험에 기반해 말할 수 있다. 만약 7일 내내 한 번도 흐려지지 않고 쨍쨍한 맑은 날씨와 하늘만을 만난다면, 전생에 나라를 구했거나 착하게 살아온 사람에게 주는 하늘의 선물일 수도... 오! 감사합니다. 를 외치면 된다.
굳이 굳이 햇빛 없는 날의 장점을 꼽아보자면, 햇빛이 그 만의 강함으로 가려왔던 사물의 본모습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사진사들이 해가 강한 12시경에는 여간해서 인물 촬영 사진을 찍지 않는 이유가 있다. 지나치게 강한 빛은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 쨍쨍함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의 채도를 올려서 기분을 짱짱하게 하지만, 실제 모습과 가까운지는 알 수 없다. 밝은 날의 광경을 보는 것은 풀 메이컵을 한 소개팅 상대와 한번 만나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같은 맥락에서 햇빛이 없는 날에 보는 사물과 풍경들은 쌩얼처럼 한 톤 어둡지만 진짜 그 상대의 본모습을 알게 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모든 게 순수한 듯 깨끗해 보이고, 좀 슬퍼 보이기도 한다. 이런 풍경들을 바라보며 나는 처음에는 좀 심심했고, 시무룩하기도 했는데, 이상하게 또 그게 언젠가부터 꽤 좋아졌다.
바로 위의 사진을 찍은 날은 사실 비가 그치기를 바라면서 예보를 모른 척하고 뛰쳐나간 날이었다. 양귀비 밭이 있다고 해서 오전에 다녀와야겠다 마음을 먹고 출발했는데, 비가 긋기는커녕 점 점 더 후드득후드득 제 맘대로 내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미 출발했으니 돌아올 수는 없고 한번 가보기나 하자는 생각에 도착한 양귀비 밭은 사람이 정말 없었다. 하긴, 누가 이 비에 꽃밭을 오겠냐며.. 그 심정이 이해가 갔다. 차라리 집에 드러누워서 카페나 알아볼 걸, 여행 계획이나 짜 볼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버글버글 거리는 상태로 꽃밭에 나 있는 길을 따라 길게 걸어 본다. 이건 밭이라기 보단 벌판이군. 아직 양귀비는 제 철이 아닌지 봉오리를 모두 피우지도 않은 상태였다. 실망을 하자니, 왠지 아직 성장 중인 아이한테 너는 왜 아직 덜 컸니?라고 불평하는 모습 같아 꾹 참았다. 봉오리들은 크기도 작고 숫자도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초록들 사이에서 충분한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조금 더 다가가서 바라보니 물기를 머금고, 이들도 나처럼 다음 날의 햇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삼다수 목장은 누군가의 추천에 의해서 한번쯤 가봐야지 했던 곳인데, 정말 별 것이 없었다. 그저 풀과 말 몇 마리(그마저도 비가 와서인지 바깥에서 볼 수 없었다.)가 다일 것 같은 광경. 주차장도 없이 흙이 풀보다 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어느 둔덕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역시, 여기도 비가 오니 사람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다. 이 쪼꼼 한 몽아리들을 가진 이름 모를 풀 말고는.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출입 구역을 표시해놓은 봉 같은 게 있었고, 그 너머로 이름 모를 풀인지 꽃인지가 가득 펼쳐져 있었다. 마치 목장을 혼자 남아 지키고 있지만 주눅은 들지 않겠다는 모습으로 생생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차고 예뻐 보여서 렌즈에 담아 보았다.
바다, 바다는 비 오는 날에는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보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바다는 맑음과 흐림의 편차가 가장 심한 풍경이라고 생각하는데, 흐린 날에는 바다가 자기의 얼굴색을 완전히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바다 색을 보면 굉장히 마음이 아픈데, 햇빛이 있어야만, 햇빛에 반사되어야만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그 모습이 되기 때문이다. 아, 바다 가고 싶다. 할 때 떠올리는 그 얼굴빛.
하지만 이게 어쩌면 진짜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은 오롯한 자기의 얼굴색일지도. 아니면 그 일부일 뿐일지도.
이런 날은 사진을 찍어 담으려고 하기보다는, 빗물이 닿지 않는 곳에 앉아서 조용히, 그리고 오래오래 바다를 느껴보는 것이 좋다. 엉뚱하게 비를 맞아봐도 좋다. 제주이기 때문에 물 맞은 기억도 좋게 희석될 테니까.
그렇게 한참을 밖에서 헤매다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이 개어올 때도 있다. 제주의 매력이 또 이러한 갑작스러운 반전인데, 갑자기 하늘이 엄청나게 부드러워진다. 듣고 싶던 한마디 말에 스르르 풀려버린 소녀처럼, 온화하게 모든 것을 비추는 빛이 나타난다. 구름을 헤집고 비추는 빛은 아주 조그마해도 시선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희망'이라는 것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이 정도 비를 맞는 둥 마는 둥, 제주를 즐기다 보면 머리카락도 헝클어지고, 적당히 화장도 떡져지고, 몸도 젖었고, 배도 고파진다. 뭔가 따뜻하고 고소하면서도 매콤한 게 당긴다! 마트에 가보니, 제주의 명물(?) 생물 전복이 싸다. 득템의 기쁨을 안고 부재료를 사서 집으로 돌아온다. 맛있는 음식으로 마무리할 수 있다면, 하루의 고됨과 아쉬움 정도는 녹아내릴 테지. 제주에서는 주로 생물 해산물 새우나 전복 등으로 요리하려고 애쓴다.
전복을 깨끗하게 씻고 손질한다. 참기름과 올리브유를 마구 부어 달군 프라이팬에 집어넣는다. 이 흥건한 기름과 전복의 짭조름한 바다 기운에 볶아먹고 싶은 어떠한 부재료라도 더 넣으면 좋다. 전복은 너무 오래 익히지 않고 야들야들한 상태가 됐을 때 잠시 꺼내놓는다. 손질 때 따로 빼놓은 전복 내장을 터뜨려 올리고 쌀밥과 함께 노릇노릇하게 볶는다. 참기름은 언제나 넉넉히! 요리를 하면서도 참으로 빨리 맛보고 싶어 지는 메뉴다.
너무 간단해서 별 것 아닌 사소한 요리지만, 맛은 명품이다.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는, 왜 서울에서 똑같은 재료로 요리를 해도 제주에서와 같은 진실된 맛이 안 나는 걸까라는 거다. 흐린 날을 즐겁게 보낸 나 자신에 대한 보상 욕구가 더해지는 것일까? 오구오구, 잘했어. 요리까지 해서 잘 먹었어. 역시 진짜 맛있어.
또 한 가지 간편하고 맛있게 즐길 수 있는 메뉴는 마트 회를 활용한 회국수. 이건 제주에서 식당 메뉴로도 판매를 하는 것인데, 사실 엄청 간단하기도 하고 맛도 좋아서 귀찮음만 잘 이겨낸다면 요리해서 먹어도 충분하다.
이렇게 나는 배를 두드리며 식사를 마친다. 무언가를 더 안 해도 될 것 같은 마음과 시간으로 잠자리에 든다. 내일 아침 언제 그랬냐는 듯 완전히 맑아져 있는 멋진 제주 하늘과 바다, 아침 햇빛을 꿈꾸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