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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품은 바다에 흠뻑 젖다

갈 때마다 반가운, 제주 송악산

by 언디 UnD

흔한 인간 유형 테스트 방법 중, 극단적으로 반대인 보기를 두 개 주고 하나를 고르게 하는 질문들이 있다. 예를 들면 짜장 or 짬뽕, 부먹 or 찍먹 같은 것. 그 대답에 따라 사람의 성향, 선호도나 습관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상대를 파악하고 부류를 나눌 수 있다.


나는 산 타입일까, 바다 타입일까. 누군가 나에게 "산 or 바다"라고 묻는다면, 어릴 때의 나는 바다가 더 좋았고, 나이가 조금씩 들면서는 산의 매력을 알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말할 것 같다. 등산을 그리 즐기지 않았던 어린 시절을 보내서인지 산에 대한 왠지 모를 거부감이 있었다. 가끔 내가 경험한 산은 수학여행 때 갑작스럽게 2-3시간을 강제로 올랐던 지리산, 설악산 같은 강력한 산들이었고 '산을 오르는 행위' 이외에는 도통 재미를 느낄 수 없는 환경이었다. 이에 반해, 바다는 뭔가 조금 더 편안하고, 부담이 없었고, 눈으로 보기만 해도 예쁘고, 뜨거운 여름을 식혀주는 시원한 해소감을 줄 것만 같다. 뭐니 뭐니 해도 쉼을 원한다면 끙끙대며 올라야 하는 산이 아닌, 바다 근처에 누워 게으름을 피우는 장면이 더 잘 어울리지 않는가.


이런 내가 제주를 만나고 달라진 점이 있다면 바다만큼 산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 그중에서도 제주 남서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송악산, 한 번도 같은 느낌, 같은 색깔을 보여준 적이 없는 그 산을 나는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송악산 초입 - 2018. 5월
송악산 초입 - 2020.10월

산과 바다의 두 가지 매력을 모두 가진 곳, 송악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송악산은 산이지만, 사실 산이 바다를 두르고 있는 형세이기 때문에 산과 바다의 맛을 모두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산인 줄 알고 찾아가 걷다 보면, 주변 풍경은 모두 바다와 멀리 보이는 섬, 하늘과 구름이다. 초입부터 야트막한 산책로가 길고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어, 고민하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만 걷다 보면 부담 없이 송악산 둘레를 한 바퀴 걸을 수 있다. 함정은 풍경이 하나하나 다채롭게 매력적인지라, 한 걸음 걷고 사진 한 장 찍고, 하다 보면 생각보다 오래 걸릴 수 있다는 것.

2020. 4월
2018. 5월

걸어가고 있는 방향 기준 왼쪽에 바다가 펼쳐져 있고, 오른편은 산과 밭, 말들이 뛰어노는 초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 두 이질적인 영역이 한 곳에서 만나 어우러져 이국적인 감성을 풍긴다. 분명 처음 보는 광경 같은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기도 한 묘한 데자뷰를 느낄 수 있다.

날이 뜨거울 때는 그늘 한 조각 없이 가장 뜨겁게 내리쬐는 이곳, 추운 바람이 부는 계절에는 한번 제대로 몰아쳐주마 하고 바람이 패대기치는 이 언덕길은 하늘을 올려다볼 때 그 진가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다. 이 곳에서는 앞만 보고, 땅만 보고 걸으면 절대 안 된다. 지구가 구 모양임을 확인하기라도 하듯, 모든 각도로 시각적인 입체감을 느껴야만 제대로 그 공간을 누릴 수 있다.

2017. 7월


2020.4월

제주는 화산이 만든 섬이다

송악산이 아주 특별한 곳이라는 것은 전체를 둘러보기도 전에 눈치챌 수 있다. 걸어가는 길 중간중간에 절벽의 단면과 같이 속살을 드러낸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곳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보여주는 지층의 단면이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다가 그대로 멈춰버린 듯한 형태가 눈길을 끄는데, 자세히 관찰하면 한 덩어리로 된 것이 아니다. 부분 부분마다 색깔과 쌓인 형태 등 특성이 조금 다르고 시차도 있어 보인다. 각자 오묘하게 다른 근원에서 생겨난 액체들이 딱딱하게 한 몸으로 굳어버린 모습이 의아하다. 몹시 뜨겁고 유연했던 그들도 순식간에 식어버리고 자기도 모르는 세월에 오랫동안 굳어져 영원히 갇혀버린 걸까.

2020. 10월

혼자이더라도, 함께이더라도 외롭지 않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걷던 사람들이 조금씩 뜸해져 가는 코스가 이 즈음부터다. 잠시 이곳을 맛보려 찾아온 이들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송악산에 취해버린 사람 만이 지도를 의식하지 않고 계속 걸어가게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송악산을 바깥으로 도는 길이 둥그렇게 나 있기 때문에, 진행 방향 반대방향으로 거꾸로 한 바퀴를 도는 일도 가능한데, 이 길에서는 내가 아직 가보지 않은, 가게 될 길을 이미 거쳐온 사람들을 뜨문 뜨문 마주하게 된다.


이후로부터는 한참 동안 시야가 좌우로 길게 뻗어 가려지지 않은 시야로 바다를 바라보며 걷게 되면서, 가슴이 시원하게 뚫린다. 위의 사진을 찍은 날에는 해가 얼굴과 온몸을 강렬하게 비추어 댔는데, 그 기분이 싫지만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바다의 경계선이 짱짱하게 빛나 누군가 자를 대고 그려놓은 것은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그 소리 없는 강렬함에 현실감이 모호해졌다. 사진 몇 장을 찍고, 잠시 멍하게, 동행이 있더라도 아무 말 없이 그저 바라보게 되는 장면이다.


이 구간이 지나고 나면 점점 보통의 산길로 접어든다. 풀 숲에 바깥 풍경이 조금씩 가리워지면서, 나무 계단을 밟아 오르면서 점점 더 아쉬운 마음이 커진다. 뒤를 돌아본다. 아직 남아있을까? 점점 더 풀과 나무 사이로 깊이 빠져든다. 아까 보았던 여운을 품고, 산책로를 따라 푸른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다 보면 금세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온다. 여정은 끝났지만 힘들지도, 지치지도 않는다. 이제 이 마음을 안고 집으로 편히 돌아가면 될 것 같다. 이렇게 나는 송악산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페이스와 기승전결을 사랑한다. 산 and 바다 전부를 보여주는 송악산은 완벽하다. 산이고, 바다이고, 탐험이자, 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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