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함께한 모든 날들이 좋았다
아, 함덕.
타이핑하기 위해 떠올리기만 해도 왠지 모를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는 이름이다. 예전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도 않고 조용해서 한여름에도 한적하게 해수욕을 즐기기 좋았던 해변. 독점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너무나 유명해져 버린 그곳. 마치 어릴 적부터 오래 알아온 친구가 연예인으로 데뷔해 버린 것 같은, 이제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겨우 그 낯빛을 바라볼 수 있는 함덕이다. 처음에는 함덕의 물빛이 너무 아름다워서 시선을 빼앗겼고, 점차 그 물에 몸을 담그고 싶어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계절을 기다렸고, 나중에는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그 곁을 서성이다가 돌아서는 것만으로도 할 일을 다 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함덕의 명물이라고 할 수 있는 델문도 카페가 생기면서 방문객은 일상적으로, 그리고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 같다. 나는 보통 사람이 지나치게 붐비는 곳은 피하려는 편인데, 델문도는 정말 희한하게도 사람이 많아도, 많이 기다려야 해도, 조금 복잡해도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함덕=델문도라는 공식을 만들어냈다고 할 정도로 연출력이 좋은 공간이고, 함덕의 이득을 많이 본 곳이다. 물가에서는 왠지 모르게 배가 고파지는 기분이라 그런지 이곳에서 늘 빵을 사 먹는다. 커피도 괜찮고, 빵도 맛있다. 다른 어떤 것도 필요 없이, 적당한 온도와 계절의 델문도의 테라스라면 그곳에서 하루 종일 지샐 수도 있을 것이다.
화창하고 밝은 날의 함덕만 경험해보았다면, 때때로 흐린 날의 함덕은 실망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약간의 푸른 기운만 감돌뿐, 특유의 환한 미소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아 우울해진 기색이 역력하다. 평소와는 다르게 꾸미지 않고 뽐내지 않은 태도인 것만 같다. 이전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듯이 되도록 비 오는 제주의 바다를 보러 가는 것을 추천하지 않는다고 했던 만큼 썩 기분이 좋아지는 풍경은 아니다. 평소에는 저 멀리 시야를 두고 칼같이 선명한 바다와 하늘 사이의 수평선을 원시로 바라보았다면, 이런 날은 발 밑, 바로 앞 지척을 넌지시 보게 된다. 혹시 어두운 날씨에 놓치는 풍경이 있지는 않을까, 더 샅샅이, 정성스럽게 바라보아 주는 것이 예의인 것처럼.
송악산의 구조와 비슷하게 함덕 해수욕장 오른쪽 끝 편에는 함덕 서우봉이라는 야트막한 산, 혹은 언덕이 있다.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홀연히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겨보면 그래도 조금 산책을 즐길만한 콤팩트한 코스가 조성되어 있다. 함덕을 여러 번 방문하면서도 여길 걸은 것은 한번밖에 되지 않는 걸 보니, 바닷가에서 그 얼굴을 최대한 오래 바라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곳인 것 같긴 하다. 마침 서우봉을 오른 날은 비가 오는 날이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제주는 늘 비를 마음속에 감추고 있으니까. 언제 그 마음이 쏟아져 내릴지는 모를 일이다. 가끔 서운하고 때론 이해할 수 없지만, 그저 껴안아주게 된 건 제주를 좋아한 후로 갖게 된 습관이다.
어느 날 함덕을 방문했을 땐, 시간대가 썰물이었는지 가득히 차 있던 물이 스르르 빠져나가 있었고, 얼마 전까지 물 속이었을 땅을 쉬이 밟을 수 있었다. 얼떨떨하게 망연자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내 주변의 아이들은 이 광경에도 신이 나서 빠져나간 물 경계선 끝까지 뛰어나가 모래를 파내며 즐거워했다. 수분을 게워내고 있는 모래사장의 바닥은 굉장히 단단했고, 모래를 밟아도 거의 밀려나지 않을 정도로 밀도 있었다. 계속해서 걸어도 썰물이 빠지는 곳까지 닿기가 어려웠다. 바다가 넓은 만큼 바다 아래의 땅도 굉장히 넓구나를 발로 밟으며 실감했다.
갑자기 어떤 장면이 떠오른다. 오래전, 피지 섬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무척 넓고 물결이 잔잔하게 움직이는 바닷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한창을 물속에서 놀다가 이제 그만 가야지 하고 몸을 일으켰는데 규칙적으로 쳐대는 물결 속을 걸어도 걸어도 내 몸이 백사장 쪽으로 가고 있는지, 바다 깊이로 더 들어가고 있는지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순간 머리가 핑 돌며 정신이 몽롱해지는 기분이었다. 약간 두려웠다. 바다에서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도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있을 것만 같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어떤 것에서 떠오른 이상한 감각이다.
나는 함덕의 해 지는 풍경도 사랑한다. 해변가에 비치타월을 깔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델문도에서 커피 한잔 빵 몇 조각을 하다가 노래도 듣고 생각을 비워내면서, 또 함덕이 알려주는 다른 말끔한 생각들로 머리를 채우다 보면 아쉽게도 하루 해가 금방 진다. 제주에서는 무언가를 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꽤 좋다. 집에 가서 뭘 해야 할까? 고민할 필요도 없다. 인터넷도 없고, 티브이 채널도 4,5개밖에 없는 제주 집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마음껏 할 수 없는 그 불편함이 자유롭다. 해 지는 풍경을 보면서 그다음을 걱정해도 되지 않을 수 있는 인생의 날이 몇 날이나 되겠는가. 멋진 하늘이 드리워졌다고 생각되면, 그냥 멈춰 서서 입을 벌리고 바라보기만 해도 된다. 사진을 찍어도 좋다. 그러나 그 사진에 함덕의 진짜 하늘은 담기지 않을 것이다. 미래에 한번쯤은 그때의 그 기억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만 담아주면 된다. 그것이 최선이고, 최대일 테니.
아름답고 붉고 처연하게 해가 져가는 풍경은 '살아 숨 쉬고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답답한 일상으로 무뎌졌던 감각을 재생시켜 준다. 나는 이 순간 말이 없어진다. 가슴이 터져버릴 정도로 말하고 싶을 때는 오히려 말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