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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가 보여주는 설렘

해 질 녘 제주를 바라보는 일

by 언디 UnD

해가 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해가 지려고 하는 그 순간을 바라보는 일은 그래서 애달프고, 괜스레 마음이 급해진다. 조금씩 빛이 기울어질수록, 눈을 뗄 수 없이 바라보게 된다. 제주의 저녁놀은 마치 오늘이 끝나면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처럼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울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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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동쪽 끝에는 성산일출봉과 섭지코지라는 아주 유명한 관광지가 있다. 거의 제주가 생길 때부터 관광지였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내, 외국인 할 것 없이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성산일출봉은 아마 해를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동쪽 끝이라는 점에서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싶다. 하루의 가장 처음 뜨는 해를 차지하고 싶은, 욕심 많고 부지런한 사람들이라면 일출 시간에 맞추어 이곳을 들렀으리라 생각한다. 나 또한 이런 목적을 달성해 보려고도 했으나, 일출시간은 너무나 일렀고 설사 힘겹게 시간에 맞춰 출근을 하더라도 기상 조건에 따라 맑게 떠오르는 해를 보지 못할 가능성도 매우 컸다. 등산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더 아기자기하고 경치가 좋은 오름들도 많은데 굳이 이 봉우리를 오를 필요는 없었다. 이 지역에는 딱히 이 두 곳 외에는 들를 곳이 없었으므로 제주에서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일몰 때의 섭지코지를 방문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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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올인 촬영지 근처
걷기를 추천하고 싶지 않은 경로

제주 동부 지역을 여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차로 이동한다면 두 곳을 모두 방문하는 것은 무리가 없다. 그럼에도 엄밀히 따져보면, 성산일출봉과 섭지코지는 약간의 거리가 있다. 굳이 두 곳 중 한 곳을 선택해야 한다면, 해 질 녘의 섭지코지를 추천하고 싶다. '피닉스 아일랜드' 혹은 '민트레스토랑'을 내비에 찍고 가면 편한데, 우연히 일몰 때 들른 이 곳의 경치가 말도 못 하게, 멋있었다. 이전에 쓴 다른 글에서 정말 좋은 것에는 다른 수식어를 붙이기가 어렵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이곳의 풍경이 적절한 예시이다. 덧붙일 말 없이 그냥, 좋다.


피닉스 아일랜드는 한화계열의 리조트인데, 한 번도 묵어본 적은 없다. 제주는 주로 나 홀로 떠난 여행이었고, 숙박 가격이 꽤나 비쌌기 때문이다. 묵으면 분명히 좋을 것이다. 경험해본 적은 없지만, 제주에서 뜨는 해와 지는 해를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 것 같다. 민트레스토랑은 통창으로 만들어진 피닉스아일랜드 한 건물의 2층에 자리 잡고 있는데, 꽤 값이 나가는 식사를 할 수 있고 커피만 마시는 것도 가능했다. 녹차 티라미수가 8천 원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당시로서는 상당히 비싸다고 생각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니 어지간한 고급 디저트 집 가격이랑 비슷하다. 카페 자리를 잘 잡고 느긋하게 앉아있을 수 있는 대가라고 생각한다면 그 가치는 가격 이상이다. 추억으로 치면 이곳은 고작 3년도 채 안됐지만, 처음 만난 뒤로 이곳은 나의 제주 최애 스폿이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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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4월. 섭지코지 근처

해가 꾸물꾸물 지려고 태세를 갖추는 순간부터 모든 장면이 하나같이 예쁘고, 독창적이다. 사방에 높은 건물이 없고 평평하게 펼쳐진 지형이기 때문에, 사실상 동쪽이지만 서쪽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태양은 원래 밝게 떠오르는 근원의 빛보다, 무언가에 살짝 가리거나 투영된 빛이 훨씬 아름답기 때문에 구름이 자주 드리우는 제주의 하늘에서 그 상서로운 자태를 제대로 뽐낸다. 너무 뜨겁고 밝아서 눈길을 피해버리게 되는 낮의 햇볕과는 다르게 부드럽고 편안하게 얼굴 위로 비치는 햇빛에 집중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시선이 따라가게 된다. 제한된 시간 동안, 끝까지 놓치고 싶지 않은 장면들이 끝없는 프레임으로 이어진다. 사진으로 아무리 담아보려고 해도, 소매 자락만 스치다가 다시 만날 수 없는 장면들이 허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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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불이 난 것 같이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하늘

태양은 낮 시간 동안 고고하게 쳐들고 빛내던 얼굴을 서서히 낮추면서, 주변을 아늑하게 물들인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멋진 그라데이션 작품을 솜씨 좋게 그려낸다. 어느 화가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연의 예술적인 움직임과 터치를 아무렇지 않게 보여준다. 내 생이 이런 날이 또 있을까? 이런 바다와 하늘을 만날 수 있을까?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추궁하며 저 멀리 시선을 고정하게 된다. 시시각각 바뀌어가는 색상의 향연에 잠깐 생각을 잃고 시공의 사이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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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함덕 근처 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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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제주시내 근처 해안

해가 완전히 져버리기 직전, 하늘은 가장 붉게 빛난다. 뜨거웠던 순간은 찰나로 돌아가버리고, 구경꾼들은 아쉬운 마음으로 어둡게 차가워져 가는 바다를 바라본다. 이렇게 끝이 난 건가, 아쉬운 마음으로 눈길을 떼지 않은 바다에서 반짝, 반짝,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하나 둘 켜진다. 바다가 예쁜 팔찌를 두른 것처럼, 저 멀리에서 가느다랗게 켜지는 빛들은 자연의 빛이 아닌 인공의 빛이다. 야간 조업을 위한 배의 조명이겠지. 다서여섯개부터 시작해서 점점 더 수평선 위를 가득히 수놓는다. 생업을 위해 수면 위에서 빛을 내는 배들이 육지 이곳에서는 액세서리처럼 휘향찬란해보인다. 한강을 끼고 수많은 차들이 자기의 빛을 내며 답답하게 달리는 동안 저 높은 빌딩 위에서 누군가는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하고 있는 것처럼, 아주, 아주 멀리서 보아야만 아름다운 장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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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민트레스토랑 앞 바다

깜깜하게 숨어버린 바다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가 보다. 지척에서도, 멀리서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어두움에 휩싸여버렸다. 저 멀리 달만 혼자 남아 긴긴밤을 지키고 다시 태양이 떠오르는 그때를 기다리려나 보다.

20201001_202032.jpg 2020년. 10월 1일의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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