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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록담 말고 사라오름

자동차 사고로 우연히 만난 제주 도민의 추천 스폿

by 언디 UnD

사라오름은 운명이었다

2016년 1월 말.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던 나는 겨울 학회가 제주도에서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뛸 듯이 기뻤다. 이 기회에 며칠 일찍 가서 겨울의 제주도 즐기고, 학회도 참석하면 겸사겸사 좋겠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전날 공항에 도착해서 집으로 오는 길부터 조금씩 뿌리기 시작한 눈발들이 점점 굵어지고 생각보다 많이 쌓였지만, 그때까지 운전 경험이 많지 않았던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일찍 도착한 제주에서의 시간을 꼼꼼히 쓰겠다고 맛집 첫 식사 타임에 맞춰 가기 위해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길을 나섰다. (당시에 그곳은 인기 과열로 기본 대기가 2시간 정도인 식당이었다.) 도로 위의 하얀 눈 자국은 거의 없어져 있었고, 나는 평소처럼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출발한 지 1km도 채 가지 않아 만난 첫 교차로에서 좌회전을 하기 위해 액셀을 밟은 순간,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차가 평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빠르게 미끄러지고 있었고 브레이크를 밟는 순간 더 심하게 반동이 가해져 그대로 철로 된 교통신호기에 쿵하고 박은 뒤 반대방향으로 180도를 돌아 길 위에서 역주행 방향으로 멈춰 섰다. 찰나의 순간 운전석과 조수석의 에어백은 동시에 터졌고, 정신을 차려보니 차 앞쪽에서는 연기가 풀풀 나고 있었다. 어쩔 줄 몰라하며 차에서 내린 나와 동행인은 한겨울 추위와 사고의 충격으로 벌벌 떨면서 도로 위에 망연자실 서 있었다. 길을 지나는 반대편의 차들까지도 서서 괜찮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나는 내가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놀랐던 것 같다. 정줄을 붙잡고 보험회사에 긴급 출동을 요청했고 조금 지나 도착한 기사 아저씨는 나에게 아무래도 폐차를 시켜야 될 것 같다고 했다.


이와 중에도 나는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잠시 잠깐의 사고로 제주집 차를 폐차하게 되다니. 세상에.

발이 묶인 상태로 앞으로 며칠 더 제주에서 묵어야 한다는 사실도 충격의 이유였다. 하.. 동행인에게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때 마음속으로 '이 분에게 앞으로 정말 잘해야지.' 다짐했던 것 같다. 빙판길에 장사 없다를 몸으로 체득해서 평생 지니게 되었던 순간이었다.


차를 잃고 우리는 버스를 타고 다니기로 했다. 이때 나는 처음 알았다. 제주에서 버스여행을 하시는 분들은 정말, 굉장한 근성의 소유자들이라는 것을. 버스 노선도 많지 않은 데다가 운행 간격도 길어서 도저히 제시간에 도착하기란 어려울 것 같았다. 가려고 했던 식당까지는 출동하신 아저씨가 어찌어찌 태워주셔서 그날은 그렇게 흘러갔는데 다음 날 학회를 가기 위해서 버스 환승을 기다리던 때 운명적 사건은 일어난다.


2번째 버스를 기다리는데, 이 버스가 진짜 죽어도 안 오는 거다. 아마 오늘이 끝나도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곳에는 택시가 다니지도 않고, 불러도 절대 오지 않을 곳임이 분명했다. 가끔 지나가는 차, 나와 동행인 말고는 그곳에 어떠한 가능성도 없었다. 날도 너무 추워 시간이 흐를수록 손발 및 뇌가 꽁꽁 얼어가고 있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를 수 있다며 다시 걸어 나가 아무 버스라도 타고 넘어가야 할지 발을 동동 구르던 그때, 한 아주머니가 차를 세우고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여기 버스 잘 안 오는데, 어디 가세요?"

"아.. 저희 제주 대학교 가야 되는데, 버스가 진짜 안 오네요."

"아, 타세요. 제가 그쪽으로 가는 길이라 태워드릴게요."

"으왓, 정말요? 아, 감사합니다..."


지인과 나는 어지간해서는 모르는 사람의 차는 안 타는 성격이었지만, 당시에는 아주머니의 제안이 구원의 손길이라고 밖에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필요한 도움이었기에 망설임 없이 히치하이킹을 했다. 아주머니는 우리의 상황을 백분 이해해주시고 편안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도 해주셨는데, 그때 나왔던 대화 주제가 "제주 도민은 어디를 즐겨 찾는가?"였다. 이미 그전에 한 차례 한라산 정상을 경험하고 죽음 가까운 지경에 다다라본 나는 제주도 분들도 한라산을 가시냐며.. 너무 힘들었다고 뒤늦게 징징거려보았다. 그때 아주머니가 이야기한 곳이 사라오름이었다. 백록담보다 사라오름이 훨씬 아름답고 볼만 하다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사라오름을 꼭 가보라는 것이었다. 아주머니는 그렇게 우리 행선지 코앞까지 데려다주시고 홀연히 떠나셨는데,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브런치, 혹시 읽으시나요?) 앞으로도 쭉 복 받으실 거예요!


그때 그 사고, 사건들이 남긴 강한 인상 때문인지, 그 뒤로도 사라 오름이라는 단어는 내 뇌리에서 쉽사리 떠나지 않았다. 천사 같은 아주머니가 추천한 사라 오름은 대체 어떤 곳일까?


사라오름을 오르다

2017년 여름의 중턱, 드디어 그것을 두 눈으로 확인할 기회가 생겼다. 제주의 오름들도 좋기는 하지만, 하루 정도는 시간을 내어 산을 올라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행선지는 고민 없이 사라오름이었다.

2017년. 7월. 이미 차로 주차장까지 오른 뒤 시작하는 등산

백록담 등반 때 알게 된 것이지만, 한라산 등반은 해발이 이미 꽤 높은 곳에서부터 시작을 하게 된다. 위의 사진 탐방로에서 볼 수 있듯, 사라오름은 한라산의 백록담으로 향하는 루트의 반 정도만 오르면 위치해 있다. 아마 한라산이 만들어질 때 분화구가 여러 개 생성되었는데 사라오름은 백록담보다 작은 세컨드 규모의 분화구 정도가 아닐까 싶다.

2017년. 7월. 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목수국꽃

사실 첫 한라산 등반 때 정상까지 오르면서 너무너무 힘들었던 기억인지라, 사라오름까지는 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정상만 아니면 괜찮겠다 싶을 정도였다. 다행히 이번에는 비가 와서 돌이 매우 매끄러웠던 지난번과는 다르게 바닥도 바싹 잘 말라있고, 좀 덥긴 해도 그늘에서는 술술 오를 만한 코스였다.

2017년. 7월. 한라산은 돌짝밭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거보다 더욱 로키한 곳.
2017년. 7월. 한라산의 빛, 색, 질감


에걔걔? 사라오름이 고작 이정도인가?

한참을 말없이 오르다가 진달래대피소가 아닌 사라오름 분화구 근처까지 와서 점심을 먹었다. 지치지 않는 용사처럼 올라온 만큼을 더 올라야 하는 정상 탐방자들과 한 자리에서 식사하는 게 왠지 민망스러워서였을까. 지금으로선 이런 식의 무단(?) 야외 취식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이때는 사라오름을 방문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도 했고, 사람들이 많은 곳을 피해 한적하게 식사하고 싶었다. 백록담처럼 분화구에는 물이 차 있었는데,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인지 생각보다 훨씬, 훨씬 더 물 양이 적었고, 누가 예의상 조금 뿌려놓은 정도로 물이 찰랑이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그냥 별거 없는데? 이런 느낌이었다. 아주머니가 특별히 사라오름을 좋아하는 분이었나. 아니면 여기에 물이 엄청 많아서 큰 호수 같은 장관을 보여줄 때가 있었던 건가?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다. 쿨한 척 기대 안 한 척,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는데 사람들이 어디론가 한 방향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뭔가 더 있는 건가 하며 무심코 따라가 본다.


2017년. 7월. 사라오름 분화구 중심은 아주 메말라 있었다. 흙밭을 바라보며 김밥 뜯는 샷.

진짜는 지금부터다!

앞서 한라산 김밥을 먹으면서 나는 사라오름에 대한 기대가 약간 꺾여버리는 듯했다. 야트막하지만 등산한 느낌을 받을 수는 있는, 체력이 안 좋은 이들을 위한 백록담 대체재 같은 곳이겠지 하며 장점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전망대 쪽에서 아래를 내려본 순간, 또다시 말을 잃고 말았다.

아, 여기가 어디지? 난 누구지? 새가 되어 그냥 훨훨 날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뿐.


아래로 보이는 광경은 믿기 어려운 광활함이었다. 절대 직선이 아닌 구불구불하고 반듯한 산세와 빼곡히 쌓인 나무들, 저 멀리 보이는 오름의 굴곡들, 도시의 건물과 도톰한 구름 띠의 향연.

시선의 움직임을 어디로부터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좌우가 시원하게 뚫려 있다. 그냥 눈길이 먼저 가는 곳부터 고개가 움직여지는 어디라도 바라보면 그만인 곳이다. 다채로운 풍경을 보여주는 곳은 아닌데, 가볍게 떠나버리기가 싫은 곳이다. 방금 오래 들여다본 장면인데도, 다시 돌아서서 보면 새롭다. 덕분에 사진첩에는 정확히 똑같은 구도와 똑같은 비율의 사진이 수십 장이 쌓여있다. 온통 가득했던 찌는 듯한 더위도 한라산의 반 정상인 이곳의 바람으로 시원하게 식혀진다. 역시, 정상의 매력은 올라오면서 느낀 힘듬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하는 시원하고 아름다운 자태다.


2017년. 7월. 사라오름 전망대


짧게 감상해 보세요!
2017년. 7월. 사라오름 전망대에서 파노라마샷

사라오름을 추천한 아주머니를 만난 것은 운명이었을까?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나는 그 전으로도, 후로도 한 사람도 사라오름을 언급하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이 곳을 와보지 않고 한라산의 매력을 잘 안다고 말하기에는 부끄러웠을 것이다. 정말 사라오름이 제주도민이 좋아하는 장소라면, 이제 나도 반쯤은 제주인의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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