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눈이오름, 다랑쉬오름
나의 첫 제주 오름은 거문오름이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거문오름은 미리 예약을 하고 가야만 입장이 가능했고, 완보하는 데에도 짧은 코스는 1시간 정도, 긴 코스는 3시간 정도 소요되는 규모가 큰 오름이다. 깊이깊이 높이 높이 들어가야 하는 만큼, 생태계가 있는 그대로 보존되어있다고 해설사님이 자부할 정도로 그 아름다움의 깊이도 깊었다. 꽤 번거롭고 힘든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제주 여행 연속으로 2번 정도 거문오름을 오르면서 꽤 만족스러웠고 오름의 매력을 충분히 느꼈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인지, 이후로는 오름을 오르는 일에 그다지 미련을 두지 않고, 우선순위에서도 밀려나 있었던 게 사실이다.
2020년이 되어서야 다시 한번 오름을 오르게 되었는데, 그 주인공이 '용눈이오름'과 '다랑쉬오름'이다.
2020년의 9월 말, 10월 초 제주는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날씨가 도와준 시기였다. 일주일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비는 한 번도 내리지 않았다. 아, 제주에서 내내 비 없는 날씨라니. 정말로 난 한 게 없었다. 날씨가 다 했다! 9월 말의 날씨이지만, 기온은 참으로 따스했고, 오히려 더울까 봐 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쌀쌀한 날씨를 대비해 가져 갔던 코트는 해가 떠 있는 낮 동안은 거의 입을 일이 없었고, 짐이 되기까지 했다.
다랑쉬오름을 올랐던 이 날도 아침 일찍부터 반짝반짝 햇살이 떨어졌다. 완벽한 날씨, 충분히 몸을 움직일 만한 행선지. 출발부터 마음속으로 신이 났다. 다랑쉬 오름 입구 주차장에서 테이크아웃으로 싸온 도시락을 까먹고, 배를 든든히 한 채로 여정을 시작했다.
'오, 생각보다 여기 장난이 아닌데?'
초반부를 오르는데 와, 경사가 보통 가파른 게 아니었다. 오름이 이렇게 헉헉대며 올라가는 곳이었나, 체력이 그새 너무 안 좋아진 건가 하며 오만 생각이 다 들었는데, 한 가지 잊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 참, 나 마스크 끼고 오르고 있었지. 소싯적에 회원님들 체중관리 코칭을 하던 시절, 마스크를 끼고 유산소 운동을 하면 칼로리 소모가 더 많다고 이야기해주던 게 생각났다. 그만큼 2배, 3배로 몸이 힘들다는 이야기이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인 것처럼, 말없이 묵묵히 양쪽에 위치한 밧줄을 의지하고 한발 한발 내디뎠다. 힘들다고 생각한 게 머릿속에서 하얗게 사라질 만큼, 그 오르막길의 끝에서 보이는 풍경은 할 말을 잃고 잠깐 멈춰 서게 했다. 그 광경은 내가 겪은 잠깐의 고난을 가치로운 것으로 승화시켜 주었다.
오름의 움푹 파인 구멍의 테두리 부분 전체가 둥그렇게 산책로인 셈인데, 오르막길을 힘차게 오르고 올라 그 원주의 한 점에 다다른 것이었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이었다. 그렇게 쭉 테두리 산책로를 따라 원점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잠깐 가만히 서서 산책로가 둘러싼 오름의 분화구 쪽 아래를 죽 내려다보니, 깊이감과 공간감이 어우러져 자연물이 아닌 아주 독특한 각도를 가진 건축물 같다. 묘하게 이 제주 땅이 생겨난 역사가 다시 또 떠올랐다. 한 번도 경험한 적 없지만 상상력을 자극하는 지형. 무심한 듯, 과거는 잊어버린 것처럼 태연하게 앉아 있지만, 그 위를 덮은 나무와 풀, 그리고 흙이 외지인은 모르는 신비로운 전설을 이어가고 있는 듯했다. 내가 영화감독이라면 이 장소를 헌팅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반지의 제왕에 나온 것 같은 대규모 전쟁 격투 신을 찍으면, 이 배경 위에 얹으면 그 규모의 웅장함이 한층 더해질 것 같았다.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그저 즐기지는 못하고 또 머리나 굴리고 있다니, 직업도 아닌 사람이 웃긴 직업병에 걸려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한적한 대자연 속에서 사람이 느끼는 감각이 '경외감'이라고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이런 건 모두가 느끼는 아주 보편적인 감각이라는 것이다. 하늘 아래에 구름과 내가 밟고 서 있는 땅, 그리고 그 땅으로부터 시작되는 넓은 오름의 곡선, 그 선을 타고 부는 바람을 느끼며 나는 내가 아닌 더 큰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또 말이 없어진다. 그저 걷는다. 타박타박. 아주 천천히 걸어도 되고, 좀 더 빠르게 걸어 운동감을 느껴봐도 좋다. 길을 잃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걸어 나가면 그것이 어디든 길이고, 끝은 다시 시작으로의 회귀일 테니.
다음 장소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방문했던 용눈이오름이다. 과거에 한번 오르려 시도한 적이 있었으나, 그날은 강풍과 함께 비와 우박 같은 것이 세차게 내렸던 이유로 높은 각도의 초반부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던 기억이 있다. 용눈이오름에 대한 인상이 오늘은 바뀔까? 조금 떨리고 설렜다. 떨리는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탐방로 초입부터 하늘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이 때문에 나는 또 자연스레 1보 1샷을 찍게 되었다.
용눈이오름의 산책로는 다랑쉬오름과는 사뭇 다른 각도로 형성되어 있다. 상대적으로 완만하게 길게 걷는 나선 형태로 진행을 하게 되는데, 곳곳에 말들이 초코칩 쿠키의 초코처럼 박혀 있다. 아니, 그냥 말이 말 그대로 정말 많다. 용눈이오름이 아니라, 말 오름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처음에는 오오, 제주스러운 말들이군. 하며 반가워했는데, 조금 걷다 보니 말X을 피해 걷는 게 미션이었다. 정상 부근까지 올라가보면 말이 이 경사진 언덕을 얼마나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를 실질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곳에도 말X이 있기 때문이다. 정상 뿐 아니라 어디에든 있다. 이 녀석들이 또 굉장히 매끈한 조약돌 모양을 닮아 있어서, 나중에는 그게 그게 아닌데도 솥뚜껑 보고 놀라는 것처럼 돌만 봐도 발을 들어 올리며 펄쩍 뛰게 되었다.
이렇게 순진무구한 동물들의 지극히 현실적인 욕구들이 난장판을 벌인 언덕이라 할지라도 오름은 오름이다. 가장 높은 지대까지 올라서서 저 멀리 내다보니, 굽이 굽이 꿀렁꿀렁 오름 형제들이 멀리서부터, 아주 가까이까지 헤엄쳐 오듯 겹쳐져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탁 트인다. 산맥의 존재가 너무 뚜렷해서 짙은 외곽의 곡선에 하늘 바탕은 그저 곁들여 놓은 것 같다.
파노라마 풍경이 기가 막히도록 멋있어 기념 촬영을 하려는 찰나, 바람이 거세게 몰아친다. 겁도 없이 이 곳의 풍경을 담아가려는 것이냐며 호되게 꾸짖기라도 하듯, 사방에서 바람이 몰아쳐 옷깃이 마구 날렸다. 결국 뒷 배경보다는 못한 관광지 인물 사진으로 남았다.
왜 사람들은 풍경에 자신의 모습을 담으려고 하는 것일까? 아름다움을 목격하는 일에도 증거가 필요한 것일까? 아름다움과 나 자신을 연합하려 하는 행위는 인생에서 늘 반복되는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다.
그래도 오름을 오르면, 제주를 바라보면, 자연 속에 있으면 그를 닮아가고 싶다. 가까이 배치하면 조금이라도 그 색깔이 묻어날까? 섞이지는 못해도 가까이 있다면 충분할 수도 있겠다.
서울에 있어도 자주 제주 여행, 제주 살이, 제주에 머무는 일을 생각한다. 그 생각은 모두 제주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다. 내 마음속 깊이 담아 둔 제주의 기억을 잊지 않고 조금씩 꺼내어 먹고 싶어서 10편의 제주에 대한 글을 썼다. 어쩌면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여행기일 수도 있다. 남들과 똑같이 제주에서 어딘가에 가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에 대한 에피소드로만 남을지 모르지만, 제주에 대한 내 마음을 담아 제주만을 위한 글을 쓰고 싶었다.
제주를 만날 때마다 더없이 행복했다. 갑작스레 태풍을 만났던 날도, 생각지 못하게 찌푸린 하늘도, 두 뺨 얼얼하게 몰아세우던 칼날 바람도, 뜨겁게 내리쬐어 땀방울이 주르륵 흐르게 하던 기세 등등 태양도, 아무것도 바랄 게 없다는 듯 촉촉하게 젖어버린 풀과 나무도, 부드럽고 온화한 공기도. 내가 만난 제주는 그랬다. 앞으로도 내가 모르는 제주를 더 알아갈 것이다. 오름의 곡선처럼 천천히, 유유하게 흐를 제주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나기를 고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