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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그 날의 세렌디피티

삼양 해변과 이름 모를 어느 해안 도로

by 언디 UnD

서울에서 못 찾은 나는 제주에 있었을까?

2020년 9월 제주 여행은 평소처럼 나 홀로가 아닌 아는 언니와 둘이 함께한 여정이었다. 이름하여 '나를 찾는 여행'. 한 번씩 퇴사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고, 새로운 직장에서 1,2년 차가 된 언니와 나는 스스로를 되찾고 싶을 정도로 조금 지쳐 있었던 것 같다. 계획적인 성향의 두 사람답게 미리 구글 맵에 꼭꼭 핀을 꽂아가며, 클라우드 문서 공유로 꼼꼼히 제주 여행을 준비하던 중, 언니가 좋은 카페를 발견했다며 꼭 가보고 싶다고 행선지를 제시했다. 그때 버킷리스트에 포함시켰던 이곳을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아직 코로나 유행이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았던 시기라 사람이 붐비지 않을 가게 오픈 시간에 맞추어 가려고 일찍 집을 나설 준비를 마쳤다.


아무리 든든히 여행 계획을 짜고, 준비를 해도 여행 중에는 뭔가 생각지 못하게 동선이 틀어지는 경우가 있다. 계획대로 이끌어나가는 것에 만족을 느끼는 스타일의 여행자들은 이런 상황들이 성가시고 난감하게 느껴질 것이다. 카페로 향하는 길에 들르려 했던 테이크아웃 가게의 오픈 시간을 미처 생각지 못한 탓에, 멋진 바닷가 풍경을 구경 삼아 앉아 도시락으로 브런치를 먹으려던 우리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미 운전을 해서 한참 달린 뒤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어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도 동선 낭비, 시간 낭비였다.

계획이 어긋난 것에서 오는 실망감을 억누르고, 언니에게 제안을 했다.

"그냥 일단 가볼까요?"

"그래, 가보자. 뭐라도 할 일이 있겠지."

"날도 좋고 한데 해안 도로 따라서 드라이브하는 건 어때요?"

"오, 그러자."


먼저 가기로 했던 카페 위치와 주차하기 좋은 자리를 확인한 후 카페 오픈 시간까지 짧은 모험을 떠나기로 했다. 우리를 자꾸만 큰길, 편한 길로 안내하려는 내비게이션의 음성을 무시하고 지도에 보이는 해안가에서 최대한 가까운 도로로 겁 없이 향했다. 내비는 운전자의 움직임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계속해서 경로를 큰길 쪽으로 파고들라고 경고를 주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어차피 계획대로 되지 않고 있으니까 이제는 운명을 스스로 택하리라는 심정으로 좁은 골목골목을 후벼 파면서 해안가 도로로 향했다. 중간중간 이런 길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정돈되지 않은 꿀렁꿀렁 비포장 도로를 달리면서, 좌석의 흔들림을 느끼면서 동시에 왠지 모를 해소감과 쾌감을 느꼈다. 언니도 옆에서 킥킥거리면서도 이 길의 끝이 어디인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보일 듯 말 듯 조금씩 저 멀리서 파란 바다 빛이 보였다.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고 싶었다.

그렇게 내비와 싸워가며 바다가 보이는 해안도로로 들어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광에 가까운 밝은 블루를 띤 바다가 도로를 기일게 감싸고 있었다. 어쩌면 다른 행선지로 향하기 위해 이 길을 지났을지도 모르지만, 글자 그대로 지나가던 눈으로만 바라보아서 이 바다가 그곳에 있었는지를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날의 햇빛 지수가 100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화창한 날이었다. 앞을 보니 햇빛과 바다가 한 몸이 된 것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맨 눈으로 바라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찬란한 빛깔이었다. 눈 앞에 이런 풍경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나와 동행한 언니, 그리고 바다와 도로밖에 없는 조용한 곳임에도, 호화스러운 장면이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걸어도 사방으로 그 공간과 장소 빛, 냄새,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주와 제주 바다를 가볼 만큼 가봤다고 생각했고, 어느 정도 잘 안다고 생각했던 나는 이때 이 도로에서 생각을 바꿨다. 아직 제주에는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나는 언제까지고 제주를 발견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겠다. 이마와 코 끝에 닿는 볕의 뜨거움 때문인지 마음이 뜨끈뜨끈해졌다.


창문을 활짝 열고 달렸다. 바닷바람과 끝없는 푸름을 피부로 맞고 싶었다. 운전을 하느라 뚫어져라 바라볼 수는 없지만 곁눈으로도 그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나 대신 언니더러 풍경을 눈에 많이 담으라고 기분 좋게 몰아세웠다. 언니는 그 날 그곳을 충분히 담아왔을까?

2020년. 10월. 토벽으로 지어놓은 것 같은 독특한 느낌의 카페 고요새

충동적인 모험의 여정은 끝나고, 도시 사람의 습성답게 카페로 돌아와 편안한 시간을 즐기기로 했다. 내부 인테리어가 굉장히 독특한 느낌을 주는 카페였는데, 왠지 가로로 긴 창으로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좌석이 인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잽싸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이웃 섬으로 떠나지 않았지만, 우도를 조금이라도 느끼게 해 주려는 의도인지 메뉴에는 땅콩크림 라테가 있었다. 먹고 나면 입이 텁텁해서 잘 택하지 않는 크림 라테이지만, 이 날은 달콤하고 시원하게 느껴졌다. 시간을 확인했을 때는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있었지만, 마음속에 멋진 풍경을 담아두어서인지,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오늘 하루의 몫을 다 한 기분, 정말 좋은 시간과 공간을 경험했을 때 드는 흐뭇한 안도감이 내려앉아 있었다. 동행인이 있어도 말없이, 편안히, 조용히 시간을 느껴본다.

2020년. 10월. 고요새 우도땅콩크림라떼와 아아!
2020년. 10월. 삼양 해변가

우연히 만난 위대한 발견, 세렌디피티

카페에서 충분히 머무른 나는 그곳을 빠져나와 창으로 보였던 삼양 해변가로 다가가 보았다. 꽤 근거리에 있는 바다이지만, 아까 본 물색과는 확연히 다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하나하나 다른 개성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처럼 바다도 지역마다 미묘하게 조금씩 다른 게 새삼 신기하고 대견하다.

형광빛으로 밝게 빛나던 아까 그 바다와는 다르게 삼양 해변은 투명하고 또 어두운 바탕색을 가지고 있다. 아마 모래알의 색깔이 전반적으로 짙고 촘촘해서 밀도 높은 데서 그렇게 보이는 가 싶다. 바다를 향해 걸어가는 나에게 물결은 천천히, 그리고 또 순식간에 빠르게 몰아쳐서 신발 코 앞까지 출렁거리며 밀려들어왔다 다시 빠져나가고를 반복했다. 내 마음도 파도를 따라 아직 식지 않은 설렘으로 울렁거리는 듯했다. 파도가 스러지는 끝쪽의 거품 무늬가 신부의 면사포 레이스를 활짝 펼쳐 놓은 것처럼 청순하다.


이 날은 계획이 삐걱거려 실망하거나 성가신 날이 아니라, 동선이 꼬인 덕분에 이 멋진 바다들을 발견하게 된 우연 같은 운명의 날이었다. 숨겨져 있는 제주의 바다들을 하나 하나 마주하면서 앞으로 내가 느낄 수 있는 푸른 감각도 더 넓어지겠지. 아무리 누려도 닳고 닳지 않는 이 기대감이 오늘도, 내일도, 지금도 나를 제주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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