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랗고 뜨겁게 빛나는 꽃무리를 좇아가는 여정
꽃을 좋아하는 나이지만, 이상하게 별로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고유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유채꽃은 그랬다. 꽃잎의 윤곽선이나 형태보다는 인상주의 화가의 그림처럼 전체적인 느낌만이 정체성이 되어버리는, 뭉뚱그린 아름다움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나라도, 특정 시기만 되면 SNS 사진을 가득 메운 노란 꽃의 향연을 모른척하기는 쉽지 않았다. 마음을 먹고 한 번쯤은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는 시기를 맞추기가 어려웠고, 이 유명한 노란 꽃의 얼굴을 2018년 이전까지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을 붙잡고, 개화 시기가 살짝 지난 5월 초 경에 유채꽃밭을 찾아가 보았다. 한낮의 햇살은 이미 충분히 따가웠고, 가녀리고 작은 노란 잎들은 볕에 맥을 못 추리고 져 가는 중이었다. 사진 촬영장소라는 팻말이 무색하게 유채꽃밭은 노란색보다 초록 줄기와 이파리의 비중이 훨씬 많이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이곳이 노란 꽃으로 가득 찬 모습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이런 게 유채꽃인가? 이걸 보려고 사람들이 그렇게 유채꽃을 외치며 찾아다닌단 말인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더니 그럼 그렇지.'
사람의 심리라는 게 참 얄궂어서, 예상보다 결과가 좋지 않으면 원래 그럴 줄 알았다며 그 본래 가치를 평가절하하곤 한다. 나 역시 왠지 허망한 마음이 들어, 기대도 안 했다는 듯 돌아섰다. 유채꽃이 날 실망시켰으니, 나도 사랑을 주지 않겠다는 심보였다. 오히려 그 시기부터 늦봄 바람을 따라 아름답고 유연하게 물결치는 파아란 청보리밭에 더 시선이 끌렸다. 규칙적인 구조와 패턴을 가지고 빼곡하게 군집을 이룬 청보리 알알이를 들여다보는 게 재미가 있었다. 청보리밭 옆 구석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몰래 낮잠이라도 실컷 자다가, 해 질 녘 어슬렁어슬렁 집으로 돌아가는 한량이 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 5월의 날씨였다. 근처 벤치에 앉아 한참을 바라보며 보리와 함께 느리고 큰 바람을 맞았다.
이런 유채꽃에 대한 내 인상이 180도 변한 것은 바로 이듬해였다. 마음속에 무의식적으로 유채꽃밭을 제대로 보고 싶다는 미련과 집착이 쌓여있었나 보다. 평소와는 좀 다르게 4월의 덥지도 춥지도 않은 꽃놀이 철에 제주를 가고 싶어 진 걸 보니. 제주는 작정이라도 한 듯 유채꽃을 가득히 쌓아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채꽃은 철저히 태양과 함께 빛을 낸다. 어두운 하늘 아래의 유채꽃밭은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무시무시한 일이 닥칠 줄 모르고 철없이 깔깔대는 어린아이들처럼, 눈치 없는 밝은 얼굴로 모여있었다. 어쩔 땐 예쁘게 튀는 얼굴도 이유 없이 눈총을 받기 마련이다. 주변의 전체적인 톤에 맞춰지지 않은 그 태도가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유채꽃의 진면모가 드러난 건, 그 다음날 환하게 밝아진 하늘 아래서 였다.
차를 타고 유채꽃이 왕성한 장소로 향하는데, 내비게이션이 미처 도착을 알리지 않았지만 그곳에 당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미 두 눈이 그 현장을 목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달리는 차 안에서 본 길가의 유채꽃부터 이미 스스로가 주인공이라는 것을 아는 눈치였다. 저 멀리서부터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마냥 활짝 웃고 있었다.
풍차 아래 끝없이 펼쳐진 유채꽃밭, 나는 잠시 정신을 잃는 기분이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 채도가 지나치게 높아진 노란색이 사방에서 빛나고 있었다. 꽃밭 안에서 조금 서 있다 보니, 색감 때문에 눈은 점차 부셔왔고, 햇살의 온도가 더 높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꽃을 보러 온 사람들이 꽤 많았지만, 꽃의 존재감으로 사람들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저 멀리까지 걸어간 사람의 머리가 꽃보다 더 작게 보일 정도로 꽃밭은 크고 넓고, 끝이 없었다. 시간과 장소의 감각을 잃어버렸다. 지금이 몇 시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의식하지 않게 된다.
'이게 제주의 유채꽃이구나.'
지금까지 유채꽃을 외면해왔던 것을 순간적으로 반성했다.
나의 선입견과는 다르게 자세히 들여다보니 유채꽃의 윤곽은 꽤 또렷했다. 가녀린 네 이파리를 가진 꽃송이를 한 대에 여러 개 모아서 가지고 있는 형태인데, 이 한 덩어리가 유채꽃줄기의 작은 단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이미 자기 자신이 꽃다발인 것처럼 그렇게 분포되어 있었다. 또 그런 줄기들이 한 덩굴로 모여 여러 줄기를 형성하고 있어서, 한 대를 뽑으면 으드드 하고 전체 뭉치가 뽑힐 것 같은 느낌이다. 풀 같기도 하면서 꽃 같기도 한 이 꽃은 그 어느 순간보다도 지금 강하게 생명력을 발하고 있었다. 스러져버릴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현재에 열정을 쏟아붓는 사랑꾼처럼.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자꾸자꾸 쳐다보게 되었다.
꽃밭을 좋아하는 건 인스타에 올릴 사진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만이 아닌가 보다. 까만 빛의 잘생긴 말이 유채꽃밭에 폭 안겨서 열심히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어쩌면 유채꽃을 먹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너에게는 이 꽃이 먹거리일 수도 있겠구나. 줄도 묶이지 않고, 부리는 사람도 없는 그 말이 자유로워 보였다. 유채꽃송이들이 좀 안됐긴 해도, 낭만적인 식사를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이 되어 멋진 사진을 남겨주었다.
유채꽃밭은 판타지이고 관광상품이라고 한때 생각했다. 4월의 제주를 만나고 나서 알게 된 사실. 유채꽃의 환상은 경험할 수 있는 현실이었다. 유채꽃이 보여주는 빛은 다음 달이면 저물어버리는 찰나의 영광일지 모르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인생의 뜨겁게 빛나는 순간을 갈망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곳에서 믿을 수 없는 그 풍경을 목격하고 마음에 담아 가지 않을까. 그게 이 꽃의 존재 이유이기에, 매년 한 시기는 이 땅에 가득히 태어나도록 허락되는 것 아닐까. 끝내 실망했던 나의 마음을 돌이켜 자기편으로 만들고 마는 제주라는 섬. 앞으로도 이 섬에 갖는 나의 편견들이 완전히 뒤집히는 순간들을 기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