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제주가 보여주는 초록

질리지도, 중독되지도 않는 그 색과 빛깔

by 언디 UnD

나는 여행지에서 일찍 눈이 떠지기도 하고, 의도적으로도 일찍 일어나는 얼리버드이지만, 제주에서는 일찍 일어나야만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것이 있다. 바로 아침에만 볼 수 있는 빛. 제주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절물 휴양림이 위치해 있는데, 이 휴양림은 오전 7시 전에 입장하면 입장료와 주차비가 모두 무료다. 처음에는 공짜 좋아하는 심정으로 오기 부리듯 7시 전에 도착을 목표로 내달려 갔었는데, 자주 가다 보니 알게 되었다. 그 시간 즈음은 돈을 더 받아도 모자랄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있는 시간이란 걸.

20200429_115445.jpg
20200429_121151.jpg
20200429_120029.jpg

아직 지나치게 강해지지 않은 햇빛이 부드럽지만 명확하게 이파리 위에 스며드는 느낌을 참 좋아한다. 빛은 한 종류인 것 같은데, 투영되는 대상에 따라 또 다른 면면을 보여준다. 이 장면을 목격할 때 나는 아무 말 없이 조용해지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혼자이지만 "아, 좋다."라는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오기도 한다. 참 쉽고 단순한 표현이 '좋아한다, 싫어한다'여서 되도록 피해야 한다지만, 이런 장면들 앞에서 그냥 좋다는 표현 이외의 것은 사족으로 느껴진다.

20200930_125606.jpg 약한 꽃잎 위에 드리운 옅은 햇빛
20200429_073002.jpg
20200429_073020.jpg
20200429_073010.jpg

모여서 우뚝 선 삼나무의 어둑한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양, 서서히 끼어드는 빛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어느새 해는 밝게 떠서 시선 45도 위에 와 있다. 비로소 하루를 정면으로 맞이하는 느낌이다. 탁 트인 공간에서 산새를 좌우로 넓게 굽어보면 매 계절마다 미묘하게 탈바꿈을 하는 산의 모습을 기억하게 된다. 어느 하루도 같지 않음이 새롭고 신선하다. 지난번에는 더 짙은 녹음이었는데 지금은 군데군데 옅게 새 잎들이 났구나, 어떤 때는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서늘한 외로움으로 담담하게 서 있구나, 화려한 가을에는 울긋불긋 새 옷을 차려입었구나, 하며 속으로 대화를 한다. 질문도 나의 몫, 대답도 나의 몫.

20180505_065307_HDR.jpg
20200429_071844.jpg
초록이 미묘하게 다른 (좌)2018년 5월 / (우_2020년 4월의 절물


20200429_071653.jpg 흰 궁둥이의 노루도 이 시간대에 만날 수 있다.

숲 속에서 노루를 만나면 행운이 있을 거라고 하는데, 아마도 노루가 마음 놓고 나와 뛰놀거나 풀을 뜯을 만큼 한적한 상황의 희소성을 반영하는 구설일지도 모른다. 그 시간이 아주 이른 아침이거나 해가 저물어 더 이상 사람들이 나다니지 않은 늦저녁일 테니, 부지런하게 움직인 사람 혹은 해 질 녘 외로이 걷기를 선택한 자들에게 행운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말이 아닐까. 그 바람 덕분인지 몰라도 나는 제주의 이 숲에서 행운을 자주 맛보았다. 위의 사진의 장면 속에서, 나는 노루 궁뎅이 버섯이 심각하게 노루 궁뎅이를 닮았구나 하고 감탄을 했다. 인간의 연상 작용이란, 작명 실력이란.. 창조주의 재치란.


20200429_115537_04.jpg
20200429_115537_06.jpg
20200429_115537_07.jpg
서서히 열리는 아침을 맞는 나무이파리들

한참 숲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시간을 망각한다. 지금이 몇 시인지, 얼마나 시간이 많이 흘렀는지에 대한 감각이 무뎌진 채로 더 멀리, 깊은 곳으로 나아가고픈 욕구와 현실로 돌아가려는 관성이 다투고 있음을 느낀다. 모험을 해보려는 찰나에, 여기서 더 걸어가면 어디에 닿게 될지 모르니까, 돌아오려면 걸어간 만큼의 시간이 걸리게 될 테니까, 또 얼마나 피곤해질까? 발바닥이 딱딱하게 아파오면 어쩌지 같은 것들에 대한 걱정이 사소하게 나를 붙잡는다. 어떤 때는 욕구에 못 이기는 척 멍청히 숲을 헤매 보기도 하고, 어떤 때는 현실의 염려가 이끄는 대로 정신줄을 잡고 주차장으로 향한다. 아직까지도 숲의 끝이 어디인지 직접 확인해보지를 못했다. 끝은 어디일까? 있긴 한 걸까?


20180505_072948_HDR.jpg
20180505_072918_HDR.jpg
20180505_073909_HDR.jpg
끝 같기도, 시작 같기도 한 이 곳
20180505_074333_HDR.jpg 나를 설레게 하는 이 광경 앞에서 속도를 내 뛰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20200429_115537_10.jpg 바로 쳐다볼 수 없는 빛을 카메라 렌즈가 대신 마주했다.
20200429_120242_01.jpg

오래 쌓인 거미줄 같은 나뭇가지의 그림자를 밟으며, 엉뚱하게도 이 그늘에 숨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이 그늘에 가려질 수 없을 정도로 부피가 있고, 두꺼운 존재인데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열망이 내 마음속에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뭔가를 덮을 수 있지만, 완전히 가리지는 않는 가녀림 속에 담기어 보고 싶은 것도 같다. 나뭇가지가 적당히 가려주기 때문에 빛이 넉넉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잠깐 다른 세계에 빠진 것처럼 몽롱해진 상태로 왔던 길을 되돌아, 처음에 만났던 삼나무들을 지나쳐 가면 외부와의 통로인 주차장이 너무도 멀쩡히 거기에 있다. 그제야 나는 아, 주차장이 이렇게 생겼었지. 인식하며 내가 어디를 갔다 온 건지 까먹어버린 것 같은 시각적 전환을 경험한다. 다음에 이곳에 다시 올 때에도, 이 숲은 그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조금 서운한 뒷모습으로 그 세계를 빠져나온다.


IMG_2501.JPG
IMG_6286.JPG
밭에서 느끼는 노란빛의 초록, 들판에서 보는 촘촘한 초록빛



keyword
이전 01화제주, 내 마음속 유토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