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의 또 다른 이름
스물다섯 살, 뉴욕에서 1년을 살게 되었다. 한 달의 유럽 배낭여행을 제외하고는 그게 내 첫 외국 살이의 시작이었다. 거칠 것이 없는 젊음 때문이었을까, 혼자 비행기를 타고 14시간을 날아 뉴욕에 처음 도착하여 "Welcome to NewYork JFK airport"라는 기내 방송을 들었을 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느껴지던 전율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승무원 준비를 시작했다. 그때 만약 내가 국내 항공사에 합격을 했었다면 내 인생은 지금과는 너무나도 다를 것이라 감히 확신한다. 재미로 봤던 사주팔자에서 내 인생에서는 물이 너무 많으니 해외를 들락날락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 미처 내가 무슨 직종의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지 말하기도 전에 승무원이 팔자에 맞는 직업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 그저 우스갯소리로 넘겼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마카오에서 일을 하게 되었을 때도, 그저 1년만 채우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리라 생각했었다. 다들 열정에 불타올라 이 회사에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임했던 입사 트레이닝에서도 나는 이미 공공연하게 '1년만 하고 떠날 아이'로 알려져 있었다. 그게 내 계획이었고 그에 맞추어 학교에 돌아갈 준비까지 미리 다 해두었다.
그랬던 내가 우연히도 마카오에서 인연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고, 1년만 하리라던 내 계획은 무려 5년 가까이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 2020년, 나는 마카오 생활 8년 차에 접어들었고 어느새 내 인생의 4분의 1을 해외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때 봤던 사주팔자가 정말 들어맞긴 했었나 보다.
해외에서 거주한다는 것과 결혼을 해서 터를 잡고 산다는 것은 거주한다는 것에서는 비슷해 보일 순 있으나, 내 맘이 내킬 때 떠날 수 없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리고 해외에서 임신과 출산, 육아를 한다는 것은 맘이 내킬 때 떠날 수 없을뿐더러 어딘가로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임신 초기에 구토를 하는 심한 입덧은 아니었으나, 두 달 정도 나름대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아침부터 자기 직전까지 울렁거리는 속, 먹고 싶어도 도무지 입맛이 당기지 않는 속, 하지만 빈속이면 더욱더 울렁거리는 속을 붙잡고 그중에서 그나마 구미가 당기는 음식을 말하라면 '엄마 밥'이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입덧이 그렇게 힘들지도 않았다. 단지, 이럴 때에 부모님이 곁에 없어서 그리운 엄마 밥을 먹지 못한다는 사실이 내내 서럽고 눈물이 났다. 가끔은 토할 것 같은 속을 가라앉히느라 창가에 앉아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아마도 서러움 반, 내가 조절할 수 없는 호르몬의 영향 반이었던 것 같다.
'출산을 어디에서 해야 하나?'라는 문제도 자연스럽게 대두되었다. 마카오의 사정을 나름 알고 있던 나는 마카오는 죽어도 싫었다. 비슷한 가격에 더 나은 시설, 더 나은 의료진이 있는 홍콩으로 최종 결정을 했다. 나는 한국에서 낳고 싶기도 했으나, 갓난아이를 태워 비행기를 타고 마카오로 돌아오는 것도 이슈 중 하나였고, 아무래도 홍콩은 마카오랑 가깝기도 하지만 아이의 영주권 취득을 위해서라도 더 나은 선택이었음에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코로나의 진원지였던 우한과 마카오는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고, 우한 다음으로 감염자가 많았던 광동지역과는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태교여행으로 친정을 선택했던 나는, 일주일 동안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돌아올 예정이었으나 갑작스러운 코로나 사태로 1주일이 2주일, 그러다 한 달이 되어버렸다. 홍콩보다는 한국이 더 낫겠다는 생각에 한국에 다시 병원을 알아보고 출산 준비를 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상황 역전. 한국도 확진자 수가 엄청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연일 이어지는 공포스러운 뉴스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임산부 확진자나 신생아 확진자가 나왔다는 소식만 들려도 가슴이 쿵 하고 떨어졌다.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다. 이러다가 한국인을 입국 금지시킬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남편과 나는 큰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어딜 가야 안전할까, 차선책으로 시댁이 있는 밴쿠버로 가자는 남편. 친정 부모님도 없고, 나이가 있으셔서 도움을 청하기 어려운 시부모님, 산후 관리도 하기 어려운 밴쿠버에서 어떻게 아이를 낳으란 말인가? 차분히 남편을 설득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마카오에 다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일 때문에 마카오에 돌아가야 하는 남편이 혹시나 돌아갔다가 한국으로 입국이 안 되는 건 아닌지, 시시각각 변하는 출입국제도에 불안하기만 했다. 나는 무엇보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에 남편이 옆에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같이 돌아가기로 했다.
입국 금지가 될 것 같은 심각한 분위기가 감돌던 저녁, 우리는 급하게 짐을 싸서 다음날 제일 일찍 떠나는 홍콩 편 비행기를 타고 떠나기로 했다. 정신없이 도착한 그날 저녁, 정말로 한국인 입국 금지가 시작되었다. 하루만 늦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하면 끔찍하다.
그렇게 다시 마카오로 돌아온 우리는 원래 계획대로 홍콩에서 낳기로 하고 담당 의사 선생님을 바꿨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는 쉽사리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홍콩에서 마카오로 직접 진료를 위해 오시던 선생님이 마카오-홍콩 페리가 셧다운 되는 바람에 오시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직접 육로로 힘들게 홍콩까지 가서 진료를 보았다. 그리고 얼마 뒤, 홍콩은 아예 모든 외국인 입국을 금지시켜버렸다.
홍콩도 결국 나의 출산을 위한 곳이 아니었다. 결국 또 담당 의사를 바꿨다. 마카오에서 병원을 다시 알아봤다. 내 출산 장소에 고려 대상도 아니었던 마카오가 only option이 되어버렸다. 마카오에서 출산하는 것은 너무 두려웠다. 왠지 믿을 수 없는 의료시설, 칭글리쉬로 알아듣기 힘든 영어, 게다가 중국어를 못하는 나.
힘주라는 때에 못 알아듣고 힘을 못주면 어떻게 하지? 너무 아파서 무통주사를 쓰고 싶은데 아무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어떡하지? 긴급 상황이 생겼는데 내가 못 알아듣고 의료진도 나한테 설명을 못하면 어떻게 하지? 제왕절개를 해야 하는데 한국처럼 기술이 없으면 어떡하지? 산후조리는 또 어떻게? 등 등 온갖 질문이 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외국에서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외국에서 결혼을 해서 그 사회에 녹아드는 것 또한 쉽지 않다. 하지만 외국에서 출산한다는 것은 어나더 레벨이다. 그리고 거기에 코로나는 덤으로. 우여곡절의 시간을 지나는 동안, 감사하게도 아이는 별 탈 없이 잘 크고 있고, 출산이 3주 앞으로 다가왔다. 아무 탈 없이, 큰 이벤트 없이 나도 아이도 건강하게 출산을 맞이하는 것. 지금은 그것 밖에는 바라는 게 없다. 물론 코로나가 어서 잠잠해지는 것도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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