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라는 작가가 낯설지도 모르겠지만은,
향수라는 소설은 한 번쯤은 들어봤을지도 모르겠다.
마음에 드는 작가 책들을 읽는 것을 좋아하지만 사실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란 소설은 어둡고 오래된 지하실 같은 퀴퀴함에 대한 기억만 남아있아 있어 (지금 생각해보면 이 또한 이 작가가 얼마나 이 소설을 잘 썼는지에 대해 생각이 들지만) 선뜻 다른 작품에 손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우연히도 제목에 이끌려 선택한 "깊이에의 강요"는 향수로만 인지했던 파트리크 쥐스킨트라는 작가의 편견에 대한 걸 깨 주었던 책이다. 다른 여러 단편을 엮은 단편집이지만 사실 많이 얇아서 받자마자 하루 만에 읽어버린 책이다. (가격에 비해 당황할 수도 있다)
#1 깊이에의 강요
말이라는 무게는 솜털 같다가도 그 솜털 하나가 인생을 짓누를 수 있다.
말이라는 무게에 대해 나이가 들어갈수록 고민하게 된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말은 점점 줄어들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이에겐 하나의 돌이 될 수 있기에 오늘도 무심코 내뱉었던 그 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삶의 깊이를 찾아야 하는 이유는 뭘까?
많은 예술이나 문학들이 그 깊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실제로 그 깊이만을 찾다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지경까지 온경우도 파다하다. 그래서 너의 학문의 깊이가 없어서 내 깊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건 너의 깊이를 반성해라는 식으로 거부감이 들지도 모른다
#2 승부
그 남달랐던 아우리의 낯선 이는 어떠한 삶을 살았기에 단순히 모든 이의 이목을 끌었을까,
남다른 아우라의 사람을 만난 사람이라면 단순히 이 사람의 인생이 철학이 궁금할 것이다. 다양한 인문학 강의나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아우라는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냥 단순히 그 낯선 이 가 손쉽게 게임을 포기했던 것처럼 별거 아닐 수 있다
(동네) 체스라는 별 볼일 없는 게임에도 인생이 녹아질 수도 쉽사리 우리는 작은 체스판에 놓일 수 있구나.
인생을 여러 가지로 비유하지만 이런 작은 게임판에서 볼 수 있을지 몰랐다. 작은 체스판의 말들 그리고 말이 놓이는 과정 그리고 주위의 구경꾼들까지 세 시간짜리 블록버스터 영화로 굳이 볼 필요가 무어있겠는가
#3 장인 뮈사르의 유언
세상은 조개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치를 깨닫고 그 조개에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 하는 자의 최후 유언
죽으면 결국 한낱 재로 아니 조개로 돌아가는 세상의 이치. 유언으로써 남기고자 했던 그의 깨달음은 과연 살아있는 우리에게 전해졌을까? 아니면 노망난 이의 조개 타령으로 남겨졌을까.
조개는 신이 었을까?
한 번도 조개에 대해 (이 파트 초반에 작가가 언급한 거처럼) 이렇게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다. 다만 읽다 보면 조개라는 존재가 신이었을까. 그래서 우리는 조개로 돌아가는 것일까
#4 나.... 그리고 하나의 고찰 <문학의 건망증>
"아주 훌륭하다!라고 긁적 거리기 위해 연필을 들이대자 내가 쓰려는 말이 이미 거기에 적혀있다"
책을 읽다 보면 그 책을 금방이라도 잊는다. 마치 처음 본책인 양 다시 들어 다시 읽는 날도 있었다. 며칠 전에 개인주의자 선언 책을 반이상이나 읽고 이 책 읽었던 책이구나 놀란적이 있다.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었던 기억이 (아니 잔상이라고 얘기해야 더 맞을 거 같다) 새록새록 생각나는 것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책은 많이 읽는데 머릿속에 남지 않는 게 아닐까, 시간낭비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훌륭한 글솜씨의 작가도 나와 같이 감탄하고, 자신의 무지에 탄식하고 또 배우는구나
이 글에서 작가가 언급하는 문학의 건망증은 다행히도 나만의 증상이 아닌 거 같아 안도했다. 학문의 견해가 깊은 사람도 같은 이유에서 고민을 하는 것은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에 대한 건망증을 해결하기 위해
앞으로 '한 페이지의 책'을 계속 진행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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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페이지의 책]은,
읽은 책들을 그냥 그렇게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페이지에 다시 읽고 싶은 글귀 또는 그냥 잡생각들을 적어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