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운 독립, 최지현 서평강 문유림 작가
나는 늦둥이 외동딸이다. 보수적인 성향, 소신이라고 말해왔지만 때로는 고집에 가까운 태도, 살림의 방식까지 엄마를 많이 닮았다. 그 사실을 나는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엄마를 닮았다”라는 말은 나를 설명해주는 문장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경제활동을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이미 독립했다고 믿었다. 적어도 경제적인 의존에서는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독립을 꽤 단순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혼과 출산, 육아를 거치며 그 믿음은 서서히 흔들렸다. 경제적인 도움은 아니었지만, 나는 다시 엄마에게 기대고 있었다. 아이를 돌보는 육체적 도움, 반찬 만들기 등의 직접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새 가정의 사소한 결정의 순간에도 엄마의 방식이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에서는 불편한 질문이 반복됐다.
‘나는 아직 독립하지 못한 걸까?’
‘부모가 된 이후에도 과연 온전한 독립이 가능할까?’
‘어쩌면 삶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에 독립을 허락하지 않는 구조는 아닐까?’
<사나운 독립>은 이 질문들에 명확한 답을 주지는 않는다. 대신 내가 너무 쉽게 믿어왔던 ‘독립’이라는 개념을 사납게 흔든다. 그리고 그 흔들림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을 덜 몰아붙이게 되었다.
최지현 작가
본문은 외할머니, 엄마, 그리고 자신으로 이어지는 여성 계보에서 출발한다. 읽는 내내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엄마를 이해하려 애써왔는지를 떠올렸다. 그 이해는 사랑이었고, 존중이었지만, 동시에 나 자신의 선택을 설명해버리는 가장 쉬운 언어이기도 했다. ‘엄마를 닮았으니까.’
이 말은 편리했다. 그 말 한마디로 나는 나의 선택과 태도를 굳이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고, 나 자신에게 질문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묻는다. 이해는 언제부터 동일시가 되었는지, 존중은 언제부터 계승이 되었는지. 그 질문 앞에서 나는 깨닫게 되었다. 내가 독립하지 못했다고 느낀 이유는 다시 엄마에게 기대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기대는 나를 너무 쉽게 과거의 나, 엄마를 닮은 나로 환원해왔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엄마의 삶을 존중하는 것과 그 삶을 내 삶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분명히 다른 일인데도 말이다. 그 깨달음은 곧 다음 작가의 글을 읽으며 더 깊어졌다.
서평강 작가
본문에서 독립은 선택이라기보다 ‘도착’에 가깝다. 이별 이후에, 상실 이후에 어쩔 수 없이 도달하게 되는 상태. 그 글을 읽으며 나는 부모가 된 이후에도 ‘온전히 독립해야 한다’라는 생각이 얼마나 가혹한 기준일 수 있는지를 처음으로 실감했다. 아이를 키우며 나는 내가 누군가의 돌봄 위에서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가 또 다른 돌봄 위에 서 있다고 해서, 그것이 미성숙함의 증거일까. 저자는 말한다. 독립은 반드시 강해지는 일이 아니며, 때로는 감당해야 하는 상태일 뿐이라고. 그 문장 앞에서 나는 조금 울컥했다. 독립하지 못한 나를 계속 채찍질해왔던 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문유림 작가
이번 본문은 관계보다는 생활에 가까웠다. 집, 공간, 하루의 리듬. 그 글을 읽으며 나는 내가 여전히 엄마에게 기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분명히 나만의 생활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나는 엄마와 같은 방식으로 살지 않는다. 같은 판단을 하지도 않는다. 도움을 받으면서도,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하고 있다. 어쩌면 나는 아직 독립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독립을 사는 중인지도 모른다.
<사나운 독립>을 읽은 후 독립을 이렇게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 독립은 완전히 떨어져 나오는 일이 아니라, 관계와 기억과 역할을 ‘재배치’하는 일이라는 것.
이 책은 독립을 누군가에게서 벗어나는 일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나의 자리를 다시 정하는 일로 이해하게 만든다. 과거의 나, 부모에게 기대던 나를 부정하는 대신,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같은 자리에 서 있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아직 엄마의 곁에 있지만, 나는 조금씩 나의 위치를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