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제법 시원해진, 밤엔 쌀쌀하기까지 한 가을이 왔다.
나는 가을이 왔음을 온몸과, 온 신경으로 느낀다.
그렇다, 나는 계절 중 가을을 탄다.
봄이 시작될 땐 그 몽글몽글한 봄의 감성을 느끼고,
여름이 시작될 땐 뜨거운 태양이 주는 그 에너지 넘치는 감성을 느끼고,
겨울이 시작될 땐 한 해가 다 지나감에 아쉽지만 모두가 볼이 빨개지도록 연말을 즐기는 그 감성을 느낀다.
그런데 유독 가을만은 그 계절이 주는 감성이 아닌 나 자신에게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또 그렇게 나만의 깊은 우물에 빠져들곤 한다.
가을의 바람이 스칠 때면,
나이 든 잎사귀가 떨어져 내 발에 밟힐 때면,
가을이 보여 주는 빨갛고, 노란 풍경을 볼 때면,
나는 이 계절이 주는 선물에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나 자신에게 집요하고 깊게 빠져든다.
우울한 감정을 지니고 사는 분들이라면 잘 알 거다.
나에 대해 깊이 빠지면 빠질수록 좋은 감정은 들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우울증’이란 건 동화 속 무시무시한 마녀의 심기를 잘못 건드려 얻게 된 저주가 아닐까 싶다.
나에게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더 깊고 깊은 우울한 우물에 빠져들어가니까.
그래도 올해는 먹고 있는 약이 잘 듣는지, 작년에 비해 가을을 덜 타는 거 같다. 역시 과학인 건가.
오늘 저녁엔 무기력한 정신과 몸뚱이 때문에 미루고 미뤄왔던 산책을 좀 해야겠다.
가을이 얼마나 성큼 다가왔는지, 먹고 있는 약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