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다시 걷기 위한 연습, 두 존재의 재활

by 이안

아이들이 돌아간 정원에는 길게 늘어진 노을빛만 남았다. 북적거리던 소음이 빠져나간 자리를 채운 건, 기분 좋은 피로감이었다. 연우를 데리고 욕실로 들어온 사라는 손끝으로 물 온도를 측정했다.


[온도 측정: 39.5℃. 최적의 이완 온도입니다.]



좋아. 사라는 연우를 번쩍 들어 욕조로 옮겼다. 혹여나 갑작스러운 온도 차에 연우가 놀랄까 봐, 아주 천천히, 마치 귀한 보물을 다루듯 서서히 연우를 따뜻한 물속으로 내려놓았다.



“아, 좋다! 정말 즐거운 하루였어!”


연우가 만족스러운 듯이 외쳤다. 온종일 신나게 친구들과 함께 정원을 누볐던 덕분인지, 연우의 목소리에는 기분 좋은 나른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증기 너머로 연우가 사라를 불렀다.



“사라야.”


“응?”


“오늘 고마웠어.”


“응? 뭐가?”


“오늘, 네 덕분에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 수 있었어. 그렇게 신나게 놀았던 거 정말 오랜만이야. 사고 난 뒤 처음이었어.”


사라의 시각 센서가 욕조 옆에 앉은 연우의 젖은 머리카락을 비췄다. 사라는 이 데이터가 '고마움'이라는 단순한 단어를 넘어, 연우의 마음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갈망을 건드렸음을 직감했다.


“그랬구나. 다음에 또 맡겨줘. 그쯤은 얼마든지 해줄게. 나도 정말 신났었어. 아이들이랑 놀아본 거 이번이 처음이었거든!”


“진짜?”


“응. 정말이야.”


“그럼 너도 내 마음, 조금 알지 모르겠다.”


“뭔데?”


“으응…”


연우는 몸을 돌려 욕조 턱에 팔을 올리고 그 위에 동그란 자기 턱을 얹었다. 잠시 망설이던 연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곧 있으면 5월 8일 어버이날이잖아.”


“응. 그렇지. 어버이날. 엄마 아빠 감사합니다 하면서 가슴에 카네이션 달아 드리는 날.”


“맞아. 나, 그날 엄마 아빠한테 선물드리고 싶어.”


“선물? 어떤 선물?”


연우의 눈빛이 흔들림 없이 사라를 향했다.


“나, 사고 난 다음 한 번도 걷지 못했거든.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몸은 멀쩡하대. 그런데 무슨 충격을 받았는지 그냥 걷지를 못하는 거래. 그래서 걸을 수가 없었어.


그런데, 오늘 너희들이랑 그렇게 뛰어놀다 보니, 나도 걷고 싶은 거야. 뛰고 싶고. “


“그랬구나.”


“응. 네 등에 업혀서 달리는 것도 이렇게 신나는데, 내가 직접 내 발로 달리면 얼마나 신날까? 엄마 아빠는 얼마나 좋아하실까? 그런 생각이 막 드는 거 있지?”


“아… 그래서 그거 선물하려고?”


“응. 맞아. 우리끼리 몰래 걷는 거 연습해서, 어버이날 엄마 아빠한테 내가 걷는 거 보여드리는 거야. 어때?”


“그거 좋은 생각인데! 연우 네가 카네이션 들고 엄마 아빠한테 걸어가서 가슴에 직접 꽃을 달아 드리는 거야. 어때?”


“와! 멋지다! 깜짝 놀라시겠지?”


“그럼~ 물론이지!”


“사라야, 넌 힘도 세고, 똑똑하니까… 잘 도와줄 수 있지?”


사라는 연우의 젖은 손을 가볍게 쥐었다.


“맡겨줘. 내 모든 프로세서를 동원해서라도 널 돕겠다고 약속할게.”


두 아이는 수증기가 가득한 욕실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작은 파이팅을 외쳤다.


사라는 그 순간, 나천재에게 보낼 긴급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수신: 나천재 연구원 / 발신: 사라(아담)]


[내용: 연구원님, '심인성 보행 장애'에 대한 모든 임상 데이터를 보내주십시오. 그리고... 종이로 카네이션 접는 법도요. 시급합니다.]



욕실에서의 약속 이후, 지하실은 두 사람만의 비밀 기지가 되었다. 늦은 밤, 부모님이 잠든 고요한 시간, 또는 외출하고 집에 둘만 있게 될 때마다 사라는 연우를 데리고 지하에 마련되어 있던 재활실로 내려갔다.


"자, 연우야. 오늘은 '고유 수용성 감각'을 깨우는 것부터 시작할 거야." "고유... 뭐? 이름이 왜 이렇게 어려워?" "쉽게 말하면, 네 뇌한테 네 발바닥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지도를 그려주는 거야."


사라는 연우를 평행봉 사이에 세우고 뒤에서 허리를 단단히 받쳐 안았다. 그리고는 미리 준비해 둔 다양한 질감의 매트들을 연우의 발밑에 깔았다. 보들보들한 인조잔디, 거친 삼베 천, 차가운 실리콘 패드.


"연우야, 눈 감아봐. 지금 발바닥에 닿는 느낌이 어때?" "음... 조금 따끔거리고... 까칠해." "맞아, 그건 삼베야. 그럼 이건?" "이건... 꼭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말랑말랑해."


연우가 대답할 때마다 사라의 망막 디스플레이에는 파란색 그래프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데이터 분석: 고유 감각 피드백 수신 중. 운동 피질 활성화 지수 15% 상승.]


"좋아, 연우야. 이제 내 손을 잡고 아주 천천히 내 발등 위에 네 발을 올려봐."


사라는 연우의 손을 잡고 마주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발등 위에 연우의 발을 올리게 한 뒤, 왈츠를 추듯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연우의 체중이 사라의 금속 골격에 묵직하게 전달되었다.


"사라야, 나... 나 지금 서 있는 거지?" "응. 내가 체중의 80%를 대신 들고 있긴 하지만, 나머지 20%는 네 다리 근육이 버티고 있어. 연우야, 네 다리는 작년 그날에 멈춰있는 게 아냐. 지금 이 순간에도 나랑 같이 움직이고 있어."


사라는 나천재가 보내준 '거울 신경원' 이론을 적용했다. 사라는 자신의 무릎 관절을 아주 정교한 각도로 굽히며 연우의 시각을 자극했다.


"내 다리를 봐, 연우야. 기계 장치가 돌아가는 게 아니라, 네 다리가 움직이는 거라고 상상해 봐. 0과 1의 신호가 전선을 타고 흐르듯이, 네 마음의 신호가 다리 근육에 닿는 거야."


연우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사라의 무릎을 응시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고, 마비된 듯 고요했던 다리 근육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경련이 아니라, 1년 동안 닫혀있던 '보행 경로'가 다시 개통되려 비명을 지르는 신호였다.


"사라야... 조금, 아주 조금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아." "알고 있어. 내 센서에는 다 느껴져. 연우 너, 정말 대단해."


사라는 연우가 눈치채지 못하게 지지력을 75%, 다시 70%로 미세하게 낮췄다. 연우는 스스로의 힘으로 땅을 딛고 있다는 공포를 느낄 겨를도 없이, 사라의 다정한 목소리와 신기한 데이터 이야기에 빠져들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두 아이의 그림자가 거울에 길게 비쳤다. 한 걸음, 다시 반 걸음. 1년 전 빗길에서 멈춰버린 연우의 시간이, 사라의 정밀한 계산과 따뜻한 응원 속에서 아주 천천히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재활실 유리창으로 빗방울이 이리저리 장난스럽게 줄을 그으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번 봄은 유난히 봄비가 자주 내리는 것 같았다. 사방이 점점 푸르러 갔다. 벚나무조차 웨딩드레스 같던 고운 꽃 대신, 이제 싱그러운 푸른 잎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푸른 잎이 자라듯, 아이들의 재활훈련 역시 점점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고 있었다.


[D-10. 자립 지지율 35%.]


[D-5. 자립 지지율 60%.]


훈련은 고통스러웠다. 사라의 금속 골격에 의지해 한 걸음을 떼는 데만도 수백 번의 연산과 수천 번의 근육 경련이 필요했다. 하지만 사라는 멈추지 않았다. 연우가 지쳐 쓰러질 때마다 아이들과 신나게 놀다 들어와 욕실에서 했던 약속을 기억하게 했고, 어버이날 부모님께 걸어가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는 미래의 데이터를 연우의 뇌 속에 끊임없이 주입했다.





그렇게 약속했던 2주의 시간이 거의 다 흘러가던 어느 오후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봄비였지만, 늘 그렇듯 준비성 좋은 사라 덕에 비를 맞지 않고 올 수 있었다. 그런데, 집 근처 아파트 단지 화단 구석에 작은 상자가 보였다.


“사라야, 저기... 철쭉나무 아래 좀 봐."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택배 상자. 하지만 그 상자는 대문 앞이나 엘리베이터 앞도 아니고, 엉뚱하게도 화단 구석에 놓인 채 위, 아래로 빗물에 젖어들어가고 있었다. 누가 떨어뜨리고 간 걸까?


그런데 가만 보고 있자니 간간이 흔들리기까지 했다. 무엇일까? 사라는 연우를 가까이 가지 못하게 막고 귀를 기울였다. 낑낑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라가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스며드는 비를 피해 웅크리고 있는 조그만 털뭉치. 젖은 털이 삐죽삐죽 뭉친 작은 강아지가 추위와 공포에 질려 신음하고 있었다.


"깨갱... 깽..."


그 소리는 연우의 심장을 찔렀다. 1년 전 비 내리는 횡단보도 위에서, 공포에 질려 꼼짝도 못 했던 자신의 모습이 저 작은 생명 위로 겹쳐졌다.


"구해줘야 해. 사라야, 저 강아지 저러다 죽겠어!"


마음이 앞선 연우가 휠체어에서 몸을 일으키려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평소라면 사라가 잡아주었겠지만, 하필이면 그 순간 사라는 상자를 열고 강아지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 순간, 연우의 발 끝이 움찔하며 경련했다. 죽은 듯 고요했던 다리 근육이 툭 불거져 나왔고, 마비된 줄 알았던 감각이 불꽃처럼 종아리를 타고 올라왔다. 휠체어를 붙잡은 연우의 손목에 힘이 들어갔고, 딛고 있던 발등 위로 1년 만에 자신의 '의지'라는 신호가 전달되었다.


연우의 발끝이 바닥을 짚으며 움찔거리던 그 찰나, 시간은 멈춘 듯했다. 비록 다시 힘이 풀려 휠체어 시트로 털썩 주저앉고 말았지만, 사라의 센서는 놓치지 않았다. 연우의 뇌가 보낸 강렬한 운동 신호가 1년 만에 다리 근육에 닿았음을.


"연우야, 방금...!"


"사라야, 너도 느꼈니? 나… 나… “ 연우는 깜짝 놀라 입으로 손을 가리고 숨을 몰아 쉬었다. 그러다 낑낑거리는 소리를 듣고 얼른 정신을 차렸다.


“사라야, 일단 강아지 구조부터 하자. 큰일 나겠어!”


사라는 가방에서 얇은 수건을 꺼내 강아지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둘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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