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폭풍 전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by 이안

연우네 지하 재활실은 오늘도 두 사람만의 비밀로 가득 차 있었다. 형광등 대신 간접조명을 켜두었기 때문에 방은 전체적으로 따뜻한 노란빛이 감돌았다.

"자, 연우야. 오늘은 우리 손만 잡고 걸어 보는 거야."

"... 진짜?"

연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행봉 사이에 선 연우는 손바닥으로 봉을 꼭 쥔 채 사라를 쳐다봤다. 사라는 한 걸음 물러나 연우 앞에 마주 서 손을 잡았다. 마치 걸음마를 시키는 엄마처럼.

"무서우면 안 해도 돼. 근데 한 번만 해봐. 한 걸음만."


연우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발끝을 내려다봤다. 이제는 제법 말을 듣는 발이었다. 훈련 초반, 마치 남의 것처럼 낯설었던 다리가 이제는 조심스럽게나마 자기 신호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봉을 놓으려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라의 손이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 혼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연우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었다.

떨리는 오른발이 살짝 앞으로 나갔다.

반 발자국.

"사라야."

"응."

"나 지금 걸었지?"

"응. 걸었어."

연우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사라는 황급히 눈을 깜빡이며 자기 시각 데이터를 교정했다.


[데이터 분석: 사용자 눈물 감지. 슬픔 52%, 기쁨 48%. 아니, 재분류 — 기쁨 100%.]


사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뒤로 한 발짝, 그리고 또 한 발짝 물러났다. 연우는 사라가 뒤로 물러가는 것만큼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갔다. 연우와 사라는 그렇게 방 끝까지 걸어갔다. 그러고는 사라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코를 훌쩍였다.

"바보같이 왜 울어."

"기뻐서 우는 거야. 바보는 너야."

"난 울 수 없거든."

"그건 또 쫌 불쌍하네." 연우가 작게 키득거렸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형광등보다 따뜻한 간접조명 아래, 작은 그림자 두 개가 나란히 벽에 비쳤다. 연우의 숨소리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사라는 연우의 등을 아주 천천히,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아무 말도 필요 없었다. 두 발로 방 끝까지 걸어온 사람과, 그 곁에서 뒤로 물러서며 기다린 로봇. 둘 다 알고 있었다. 이게 시작이라는 것을.

"이제 곧 엄마 아빠한테 보여드릴 수 있겠다. 어버이날에 늦지 않게."

"물론이지."

연우가 몸을 떼고 사라를 올려다봤다. 눈가가 빨갰다. 뺨에는 눈물 자국이 얇게 남아 있었다. 연우가 손등으로 쓱 훔쳤다.

"고마워, 사라야. 진짜로."


[데이터 기록 — 이 문장은 로그로 남기지 않겠다. 그냥 기억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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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저녁. 서울 어딘가의 호텔 라운지.

창밖으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창가 자리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서류도, 노트북도 없었다. 양복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앉은 남자의 눈은 창가를 향해 있었지만, 시선은 어디에도 닿지 않는 것 같았다.

인공지능 연구센터장이었다.

맞은편엔 중국계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양복 안에 도드라지는 어깨.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은 천천히, 규칙적으로 가죽 소파 팔걸이를 두드리고 있었다. 이름은 황. 그것뿐이었다. 명함도, 소속도 없는 사람.


"서버를 받은 지 한 달이 넘었습니다."

황이 한국말로 말했다. 억양에 기름기가 흘렀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 팀 최고 엔지니어들이 달려 붙었어요. 세 팀이나. 쉬지 않고."

"..."

"핵심이 없어요."


센터장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껍데기만 있다는 거죠. 우리가 원하는 것, 그 자아 구조, 자가 판단 알고리즘... 다 없어요. 비어있어."

"그럴 리가..."

"센터장님."

황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손가락이 두드리던 리듬이 멈췄다.

"우리가 거래를 했죠. 그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거래는, 한쪽만 이행된 상태예요."

센터장의 손이 무릎 위에서 슬며시 쥐어졌다.

"제가 드린 서버는 분명히 아담의 서버입니다. 모든 데이터가 있어요."

"모든 데이터는 있어요. 맞아요."

황이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게 작동을 안 합니다. 부팅은 돼요. 반응도 해요. 그런데 자기 판단을 안 해. 시키는 것만 해. 그건 우리가 원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원하는 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창밖으로 유람선 하나가 느릿하게 강을 가로질렀다.

"AGI. 그게 당신이 판 것이었잖아요."

"저는 그렇게 말한 적이..."

"센터장님."

황이 테이블 위로 상체를 천천히 기울였다.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부드러웠지만, 그 아래에 깔린 것은 전혀 부드럽지 않았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죠.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센터장은 입을 다물었다. 황의 말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센터장이 지금껏 쌓아온 것들. 그 모든 것이 이 남자의 손안에 있다는 뜻이었다.

"일주일 드리지요. 핵심을 찾아서 가져오면, 아무 일도 없던 겁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황은 말을 끝맺는 대신 세터장의 눈을 가만히 보기만 했다. 그것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자리에서 일어선 황이 재킷을 가볍게 털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라운지를 나서는 황의 뒷모습이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끝까지 눈으로 좇던 센터장은, 그제야 오른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손바닥을 테이블 위에 꾹 눌러 떨림을 멈추려 했지만, 뜨끈한 커피잔과 달리 그의 손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핵심이 없다니.

비어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머릿속으로 목요일 밤이 빠르게 되감겼다. 자기가 직접 확인했던 폐기 절차. 삭제 완료 메시지. 분명히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핵심이 없다니. 이건 단순한 데이터 손상이 아니었다. 뭔가 빠져나간 것이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센터장은 뒤통수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에 뜬 연락처들을 스크롤하다 멈췄다.

'목요일 밤. 폐기 직전.'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처음부터 다시 들여다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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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네 집 거실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뭉치가 방석 위에 동그랗게 말려 자고 있었다. 숨 쉴 때마다 통통한 배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온 세상 걱정 하나 없이 곤히 자는 모양이었다.

엄마가 주방에서 나들이 갈 준비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일은 어린이날. 사라까지 모든 식구들이 가까운 곳으로 소풍을 가기로 했다. 엄마는 피크닉이라면 돗자리에 도시락이 당연하다며 옛날 식으로 도시락을 고집하곤 했다. 아빠는 엄마와 함께 준비한다고 했지만, 소리를 들어보니 엄마 옆에서 또 뭘 몰래 집어먹다 손등을 찰싹 맞고 엄살을 피우는 것 같았다.


연우는 방에서 카네이션 꽃바구니를 꺼내 들여다봤다. 어제 친구들과 우유팩으로 만들었던 바로 그것이었다. '이거 들고 걸어가서 직접 가슴에 달아 드리는 거야. 엄마 아빠한테.'

연우는 꽃바구니를 가슴에 살짝 안았다.

문이 살짝 열리고 사라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연우야, 안자?"

"응. 자야지. 근데 사라야."

"응?"

"어버이날 말이야.... 잘할 수 있을까?"

사라는 방 안으로 들어와 연우 옆에 앉았다. 잠시 생각하는 척 고개를 기울였다.

"오늘도 걸었잖아."

"..."

"손 잡고 걸었잖아."

연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한 손만 잡고 걸을 거야. 그리고 그다음 날엔 손 안 잡고 혼자 걸을 거고."

"앗, 그렇게? 그럼... 어버이날엔 나 혼자 걸을 수 있을까?"

"당연하지."


배시시. 연우가 웃었다. 그러고는 꽃바구니를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올려두고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뭉치가 어느새 방으로 들어와 연우 발치에 몸을 웅크렸다. 작고 따뜻한 온기가 발끝으로 전해졌다. 강아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눈을 껌뻑였다. 그냥 연우 옆에 있고 싶어서 왔을 뿐인 것처럼.

연우는 천장을 바라봤다. 어버이날. 손 잡고 걷는 게 아니라, 혼자. 꽃바구니 들고. 엄마 아빠한테 걸어가서.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서운 것과 설레는 것이 반반씩 섞인 두근거림이었다.

"사라야."

"응."

"고마워."

사라는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연우의 숨소리가 차분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사라는 그 옆에 조용히 앉아, 어둠 속에서 혼자 망막 디스플레이를 켰다.

나천재의 메시지가 다시 한번 눈앞에 떠올랐다.

[아담, 위험한 일이 생기면 내가 좌표 찍어주는 곳으로 피해. 차돌 연구원 동생이 하는 가게야.]

'위험한 일.'

사라는 잠든 연우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진짜 두려움이 뭔지, 사라는 이제 알 것 같았다. 파괴되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 연우 곁에 있지 못하게 되는 것. 그게 두려웠다. 코끝이 오르락내리락, 귀밑 솜털이 숨결에 살랑였다.

내일은 어린이날이었다. 그리고 또 두 밤만 자고 일어나면 어버이날. 바로 연우가 혼자 걸을 날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었다. 갓난아기 몸으로 부모님께 온 것이 생일이라면, 그날은 자기 발로 걸어서 부모님께 가는 날이니까. 다시 태어나는 거나 마찬가지인 날.

앞으로 며칠, 정말 중요한 날이야.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위험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기를. 사라는 눈을 감고 바라고 또 바랐다.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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