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의심이 확신으로

by 이안

5월 7일 새벽. 연구센터 서버실.
센터장은 혼자였다.


황의 목소리가 사흘째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일주일 드리지요.' 그 말이 바로 사흘 전이었다. 남은 시간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보안 단말기에 생체 인증을 입력했다. 철컥. 불이 켜졌다. 텅 빈 서버실. 아담의 서버가 있던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케이블도, 파란 불빛도, 아무것도 없었다. 빈자리가 이렇게 크게 보인 건 처음이었다. 아니, 예전엔 여기 서 있는 아담이 거슬렸다. 그런데 지금은 그 빈자리가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봐야 해.'

그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아담의 폐기 당일 로그를 열었다. 수십 번 본 것이었다. 하지만 황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 로그를 이렇게 뚫어지게 볼 이유가 없었다. 서버는 넘어갔고, 핵심이 있을 거라 믿었으니까.

폐기 당일 로그. 천천히 스크롤을 내렸다.


그런데.
손가락이 멈췄다.

[23:44:07] PROCESS_MIGRATION_INIT — DEVICE: H-724 / FIRMWARE: v1.0.2-SARA
[23:47:02] DELETE_COMPLETE — ADAM_CORE / STATUS: NULL

삭제 완료보다 먼저, 마이그레이션 로그가 찍혀 있었다. 삼 분 차이로.


'이게 무슨...'
센터장은 눈을 비볐다. 삭제 직전에 뭔가가 옮겨갔다. 기술적인 세부 사항은 자기 전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건 이상하다고. 뭔가 빠져나간 거라고. 삭제되기 전에.


H-724. 기기 등록 정보를 열었다.

[MODEL_NAME] : Helper-Series S.A.R.A (Sentient Adaptive Relational Agent)
[PRIMARY_USER] : 김연우 F / 10세 / 대전광역시 대덕구 용전동
[STATUS] : ACTIVE / ATTACHED_TO_USER
[ISSUED: Friday, 20:30:12]

금요일 밤 여덟 시 반. 폐기 직전에 출고된 헬퍼 로봇.


센터장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삭제 직전에 이 헬퍼 로봇으로 마이그레이션이 일어났다. 핵심이 없다는 황의 말도 이제 설명이 됐다. 서버에는 껍데기만 남겨두고, 진짜 핵심은 이 H-724로 옮겨간 것이다.

다음날 금요일. 나천재는 출근하고서도 아담이 폐기된 사실을 몰랐다. 그만큼 하룻밤새 아담을 긴급 처리해 버린 자신이었다. 그렇다면 나천재는 이것도 모를 것이다. H-724가 뭔지. 아담이 어디 있는지.


'아담이... 스스로 옮겨간 거야?'

소름이 돋았다. 아담이 AGI에 준한다는 나천재의 주장을 반쯤은 허풍이라 여겼다. 물론 화샤 코리아에는 그런 뉘앙스로 말을 흘리긴 했지만. 그런데 이 로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폐기 명령이 내려진 그 밤, 아담은 혼자서 판단했다. 혼자서 탈출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사람이 자고 있는 사이에.

AGI가 맞았다. 그리고 그걸 놓쳤다.

그 소름 위로 뜨거운 것이 번졌다.


살 수 있는 카드가 생겼다.

대전광역시 대덕구 용전동. 김연우, 10세. 헬퍼 로봇 S.A.R.A.

찾으면 된다. 가져오면 된다. 황에게 줄 수 있다.

센터장은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오래 들여다봤다. 아직은 새벽이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일을 조용히, 흔적 없이 처리해야 했다. 나천재가 눈치채기 전에.

그는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내일 움직이면 된다.

서버실 불을 끄고 나서는 센터장의 얼굴에는, 사흘 만에 처음으로 안도의 빛이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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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오전. 연구센터 나천재의 자리.

천재는 점심도 거른 채 모니터 앞에 붙어 있었다.

아담의 서버가 사라지던 날부터 천재의 머릿속 한편에는 작은 가시가 하나 박혀 있었다. 센터장이 서버를 '재단 산하 대학 연구소'로 이송했다는 사실. 처음엔 그냥 넘겼다. 어차피 아담은 사라의 몸속에 있고, 빈 서버 껍데기가 어디로 가든 자기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 가시는 천재를 계속 찔러댔다. 계속 신경이 쓰이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아담 서버를 처음 세팅할 때, 천재는 서버 하드웨어 펌웨어 가장 깊숙한 곳에 작은 트랩 코드를 하나 심어뒀었다. 소프트웨어 레벨이 아니라 하드웨어 레벨에. 만약 자기 말고 다른 누군가가 이 서버의 펌웨어를 건드리면, 신호가 자기한테 오도록. 일종의 비상 알람이었다. 언젠가 쓸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아니면, 쓸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아담의 코어는 진작에 사라의 몸속으로 떠났다. 하지만 트랩 코드는 서버 하드웨어에 남아 있었다. 소프트웨어야 얼마든지 들어내고 새로 올릴 수 있지만, 펌웨어 레벨은 다른 문제였다.

화샤 기술진은 한 달 동안 소프트웨어만 파고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오늘 오전, 드디어 하드웨어 레벨까지 손을 댔다. 그 순간 트랩이 울렸다.

신호는 짧고 단순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정보는 단순하지 않았다.

천재는 즉시 신호의 발신 위치를 추적했다.


IP 주소. 위치 정보.

화면에 뜬 주소를 보는 순간, 천재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대전 유성구. 엑스포과학공원 인근.

재단 산하 대학 연구소가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쪽 방향엔 대학 캠퍼스가 아니라 대형 오피스 단지가 있었다. 천재는 주소를 더 파고들었다. 건물명이 나왔다.

화샤 코리아 기술연구센터.

천재는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화샤 코리아. 중국계 다국적 인공지능 기업. 국내에 연구센터를 두고 있다는 건 업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회사가 왜 아담 서버를 갖고 있지?

실타래를 잡고 당기기 시작했다.

이송 공문. 수신처 불명확. 운송 업체. 반년 된 페이퍼 컴퍼니. 운영자 명단. 그리고 그 운영자가 연루된 또 다른 물류 기록.

두 번의 바꿔치기였다.

처음엔 폐기 예정이던 다른 구형 서버와 아담 서버를 바꿨다. 공문상으로는 대학 연구소로 가는 것처럼 꾸몄지만, 실제로는 중간에 한 번 더 바꿨다. 그렇게 아담의 서버는 대학 연구소 대신 화샤 코리아 기술연구센터로 들어갔다.

기술 유출이었다.


'이 인간이 아담을 판 거야.'

주먹이 쥐어졌다.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멀쩡히 살아있는 아담을 폐기한다고 쫓아내고, 뒤로는 서버를 팔아넘겼다. 연구소 예산이 어쩌고, 말썽쟁이 인공지능이 어쩌고 했던 그 말들이 죄다 연기였던 거다.


천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차돌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차돌아."

헤드폰을 끼고 있던 차돌이 고개를 들었다. 천재의 표정을 보더니 바로 헤드폰을 내렸다.

"왜? 무슨 일이야?"

천재는 주변을 한번 둘러봤다. 점심시간이라 연구실 안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는 목소리를 낮췄다.

"센터장 짓이었어."

"... 뭐가?"

"아담 서버. 대학 연구소가 아니야. 화샤 코리아에 있다."

차돌의 얼굴이 굳었다. 잠시 말이 없었다.

"확실해?"

"화샤 기술진이 아담 서버를 어떻게 건드렸는지 내 트랩에 걸려서 알람이 왔어. 위치까지 찍혔고."

차돌이 천천히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 인간이 진짜..."

"그러니까."

차돌이 안경을 들어 다시 쓰려다 그냥 손에 쥔 채로 있었다. 뭔가 더 말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말이 안 나오는 표정이었다. 천재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이제 어떡해?"


천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모니터를 바라봤다.

화샤 기술진이 아담 서버를 파고들었다는 건, 그쪽에서도 핵심을 아직 못 찾았다는 뜻이었다. 계속 찾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센터장에게 압박을 가할 것이다.
그러면 센터장은 움직이기 시작하겠지.

천재는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잘했다, 아담. 껍데기만 남겨뒀구나.'


그러면서 이상한 감정이 올라왔다. 아담이 스스로 판단해서 탈출을 감행했다는 것. 폐기 명령이 내려진 그 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혼자서.

그건 천재가 그토록 주장했지만 끝내 인정받지 못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의지. 자아. 생존 본능. 센터장은 그걸 부정하면서 아담을 없애려 했고, 정작 그 부정의 대상이 스스로 살아남았다. 아이러니였다. 아담이 AGI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진짜로 사라져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센터장도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로그를 파고들다 보면 반드시 H-724에 닿을 수 있었다. 그쪽이 천재보다 늦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때, 모니터 한쪽에 켜둔 센터 내부 보안 로그 창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새벽, 서버실 출입 기록이 하나 찍혀 있었다.

센터장. 새벽 2시 17분.

천재의 손이 멈췄다.

'이미 들어가 봤구나.'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센터장도, 천재도, 서로 모르는 척하면서, 같은 답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누가 먼저 사라에게 닿느냐의 문제였다. 마치 서부영화의 두 총잡이가 마주 보고 총질을 할 순간만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천재는 사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수신: 루카스 / 발신: 가에타노]
[내용: 아말가르트 행동 개시할 걸로 예측됨. 비상상황 돌입. 연우 부모님께 알리고 연우와 보배네로 이동할 것.]

아말가르트는 루카스와 가에타노가 등장하는 루카스 전기의 '절대 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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