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시공여행

대나무 비닐우산

by 이안

대나무 비닐우산


내가 어릴 적. 비 오는 날이면 비닐우산을 쓰고 다녔다. 할머니나 부모님은 모두 장우산이나 접이 우산을 사용했지만, 나와 동생은 늘 비닐우산을 들고다녀야 했다. 내가 잘 흘리고 다니는 까닭도 있었지만, 비닐우산이 크기도 적당하고 무엇보다 가볍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에 그때 그 비닐우산의 가벼움은 요즘 나오는 경량 우산을 능가하는 것 같다.


당시 비닐우산이 그렇게 가벼웠던 것은 재료 탓이었다. 얇은 파란색 비닐, 속이 텅 빈 대나무, 그리고 약간의 철사가 전부니 가벼울 수 밖에. 그렇게 가벼우니 아이들이 들고 다니기엔 딱 알맞았다.

속이 텅 빈 통 대나무로 우산대를 삼고, 그런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 우산 살을 만들어 그 위로 파란 비닐을 덮어 만들었다. 적당한 높이에 홈을 파 그 안에 기역자로 구부린 철사를 끼워 넣으면, 그게 바로 버팀장치가 된다.


대나무로 만든 우산이라니. 아마도 일일이 다 손으로 만들었을 것이고, 요즘이라면 수공예품 취급을 받았을 그런 우산이 당시엔 터무니없는 가격에 팔렸다. 인건비가 낮고도 낮던 시절이었다.

우산에 쓴 비닐은 또 얼마나 얇은지 우산을 위아래로 살짝살짝 흔들면 펄럭펄럭 흔들릴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날카롭거나 뾰족하게 튀어나온 것에 걸리면 쭉 찢어지기 일쑤. 그야말로 '일회용' 우산이었지만, 나랑 내 동생은 물건을 곱게 쓰는 편이어서 우산 하나를 제법 오래 쓰곤 했다.


아주 어렸을 땐 비가 오는 날엔 웬만하면 밖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장난칠 때는 빼고. 하지만 좀 더 자라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유치원도 가야 하고 학교에 가야 한다. 유치원 시절, 유치원 앞에 개천이 있었는데, 장마였는지 태풍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비가 억수로 왔던 날이었다. 아침에 유치원 갈 때에는 오지 않던 비가 집에 갈 때가 되니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그렇게 퍼부었다면 아마 유치원은 가지 않았을 것 같다.


다리가 없는 개천이라 징검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그때 느꼈던 긴박감이라니! 얇은 비닐을 뚫을 듯이 퍼붓던 장대비와 비닐우산 정도는 가볍게 뒤집어버린 돌풍. 어른들은 미끄러져 빠질까 걱정했겠지만, 난 무슨 일이었는지 그날 스릴 넘치는 모험을 한 것만 같았다. 급하게 철철 휘돌아가며 흐르던 물소리, 빗물 냄새, 장화 속으로 들어와 미끌거리던 빗물, 아무리 꼭 쥐어도 펄럭이며 벗어날 것만 같던 비닐우산의 대나무 손잡이.... 50년이 넘게 흐른 지금도 그때 느꼈던 것들은 어제처럼 생생하다.


그런데, 국민학교 3학년이 되면서 그때까지 잘 쓰고 다니던 비닐우산이 보기도 싫어졌다. 창피하기까지 했다. 나도 어엿하게 이쁘고 멋진 우산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거다. 그것은 바로 같은 반 친구가 쓰고 다니는 우산 때문이었다. 아직도 그 친구와 그 친구의 황갈색 우산이 생생한 걸 보면 무척 인상 깊었나 보다.


삼천포에서 온 친구였는데, 별빛 같은 눈동자에 빨간 입술이 아주 예뻤다. 뽀얀 얼굴에 웃으면 보조개가 쏙 들어갔던 것 같다. 어깨 너머 등으로 내려가는 반곱슬 머리를 반묵했는데, 살짝 허스키한 목소리에 그때까지 흔히 들어볼 수 없었던 경상도 사투리가 아주 매력적이었다. 최미정이나 정미였나. 이름은 확실하지 않지만 그랬던 것 같다.


멀쩡한 우산은 어른들만 들고 다니는 건 줄 알았는데, 아이들 우산이 따로 있다는 건 그때 처음 알았다. 아이들도 들고 다닐만한 크기의 우산이라니! 갑자기 내 파란색 비닐우산이 꼴도 보기 싫어졌다. 그전까지는 시커멓지 않고 하늘이 비쳐 보이는 파란 비닐우산이 정말 좋았는데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내 동생에게도 어린이 우산이 생긴 걸 보면 그 무렵이 어린이 우산이 막 보급되던 시기였나 보다. 하지만 우리 우산은 그런 세련된 황갈색 우산이 아니라 노란 병아리색 우산이었다. 비 오는 날은 노란색 우산을 써야 눈에 잘 띄고 좋다는 이유에서였다. 살짝 마음에 들지 않긴 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싶어 감사한 마음으로 잘 쓰고 다녔다. 원래 신고 다니던 장화와 똑같은 색깔인 점도 나쁘지 않았고.


하지만 새 우산은 내가 아무리 들썩여도 펄럭일 줄 몰랐고, 비 오는 날 하늘을 새파랗게 보이게 하거나 또르르 빗방울이 굴러떨어지는 걸 보여주지도 못했다. 물론 우산을 펴고 접을 때마다 대나무 우산 살처럼 가시가 박힐까 조심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새거라고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 보니, 촌스러워 보였던 그 파란색 비닐우산은 내게 그저 비를 막아주는 도구가 아니었다. 펄럭이던 소리, 찢어질까 조심하던 마음, 하늘이 비치던 투명한 푸른빛까지. 내 어린 시절의 가볍고 순수했던 기억들이 그 얇은 비닐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옛날엔 30원정도했던 우산. 글을 쓰며 찾아보니 2013년엔 개당 2만 원이었습니다. 비싼 것도 놀라웠지만, 그때까지 살아남았던 것도 놀랍네요. 주로 방송 소품으로 판매되는 것 같았어요. 혹시 어떻게 생긴 걸까 궁금하실 분을 위해 링크 첨부합니다. :)


스레드 - 이 우산 써봤으면 40대 이상

500원하던 '대나무 비닐우산'을 아시나요? 이제는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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