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동네 문방구, 그 시절의 풍경을 기억하며
근처 초등학교 앞을 지나다 보니 옛날 문구점 자리가 이제 카페가 되어 있었다. 분식점 자리도 디저트 카페로 바뀌어 있었다. 초등학교 앞이라고 아이들이 돈 쓰는 곳은 이제 아닌가 보다. 이 초등학교뿐 아니라 다른 초등학교 앞도 마찬가지. 문구점 네 곳이 모두 문을 닫았다. 학교 끝나면 아이들이 바글바글 모여 게임도 하고 간식도 사 먹던 그런 곳이었는데. 어릴 적 학교 앞 동네 문방구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내가 어릴 적엔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고 불렀다. 집 앞 2차선 도로를 건너면 바로 나오는 학교가 하나 있었고, 쭉 더 내려가면 아랫동네에는 아빠가 졸업한 학교가 있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언덕배기를 올라가야 나왔다.
난 2차 베이비 붐 세대인데, 당시 얼마나 아이들이 많았는지 2부제는 보통이었고 심지어 3부제를 하는 학교도 있었다. 나중에 전학을 간 학교도 과밀학급이어서 5학년 때 우리 반은 무려 105명이나 되었다. 앞에서 한 아이가 일어나면 뒤로 밀려 밀려 맨 뒤에 있는 아이는 책상에 눌려 아파 소리를 지를 정도라 얼른 일어서 공간을 만들어줘야 할 정도였다. 학급당 20명 남짓한 요즘으로선 통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일 듯하다. 그런 시절이었으니 아이들을 상대로 하는 문방구는 학교 앞에 몇 개씩 있어도 망할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인원수가 적어 학교 앞 문방구가 딱 하나밖에 없었는데, 공식 매점은 아니어도 지정 공책이나 체육복 같은 것들을 팔고 있어서 거의 매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특혜를 누리다 보니, 학생들에게 해로운 것이나 사행심을 자극하는 것들은 거의 팔지 못했다. 기껏해야 조미 오징어를 조금씩 소분해 파는 정도. 그러니 구경하는 재미는 저 아랫동네 학교 앞 문방구에 비교할 수도 없었다.
반면, 그 학교 앞에는 골목부터 교문 앞까지 문방구 서너 곳이 쭉 늘어서 있을 정도였다. 아이들이 넘쳐나니 한두 곳으로는 어차피 감당이 안 되었고, 심지어 잘 안 되는 곳이라도 웬만큼의 매출은 보장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문구점이라고 하지 않고 문방구라고 했는데, 그런 문방구에는 정말 없는 게 없었다. 크지 않은 공간을 알뜰히 활용하는 게 한눈에 보였는데, 추녀에 달린 돼지 저금통과 딱지, 종이 인형, 줄줄이 사탕부터 바깥 매대에 진열된 공책, 지우개, 유리문 바로 앞에 놓인 하드 통까지 사람이 다니는 통로가 아닌 곳은 죄다 진열 공간으로 활용했다. 안쪽에는 크레파스, 물감, 실내화 등등이 있었는데, 가격대가 있거나 실내에 보관해야 하는 것, 필요에 의해 꼭 사야 하는 것은 매장에, 견물생심을 노려야 하거나 아이들이 그냥 슬쩍해도 손해가 덜 나는 저가품들은 밖에 배치하는 등 나름 선진 마케팅 전략을 적용한 상품 진열로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아침 등굣길엔 그날 챙겨갈 이런저런 준비물이며 어제 잃어버린 지우개, 다 쓴 공책 같은 걸 샀다. 아이들이 워낙 많아 기다리는 동안에는 어떤 지우개를 살까, 어떤 공책, 어떤 스케치북을 살까 구경하며 열심히 물건을 골랐다. 물론 아이들인 만큼 물건의 질보다는 표지에 그려진 그림으로 선택했는데, 그 무렵 골랐던 스케치북이 아직도 생각난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와 동물 친구들이 그려진 것을 보고 반가워해서 냉큼 샀던 기억. 그래서 요즘도 로열티를 내고 디즈니 캐릭터를 들여오나 보다. 그것 말고 자주 썼던 것은 흰 바탕에 검은 선이 가로세로로 교차되고 중간중간 빨강 노란색이 들어있는 것이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게 바로 몬드리안의 부기우기라는 작품이었다.
하굣길에는 좀 더 느긋하게 여러 가지 것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동그란 딱지를 살까, 아니면 종이 인형을 살까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고, 왜 돼지저금통은 빨간색밖에 없을까 궁금해하다 노란색 연두색 돼지 저금통이 새로 걸리는 걸 보고 '역시 돼지 저금통은 빨강이 낫다'라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피아노 학원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문방구가 있었는데, 젊은 부부가 하는 그곳은 뭔가 다른 문방구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지금 생각하니 좀 더 '문구점' 느낌이 강한 곳이었다. 딱지나 종이 인형 같은 것보다 문구 비중이 높았다. 특이했던 건 다양한 연필을 유리 상자에 빼곡하게 담아놓고 낱개로 팔았는데, 마치 연남동 흑심 같기도 했다. 부모님은 주로 사파이어 연필처럼 칙칙한 색의 연필을 타스로 사다 놓고 깎아주셨는데, 그곳에서 노랑, 빨강, 은색 연필을 발견하고는 한 자루씩 사서 쓰는 재미를 느끼기도 했다.
그러다 선물의 집이라는 게 생기면서 문방구보다 그곳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눈을 현혹하는 예쁜 메모지와 편지지, 보물함, 각종 선물용품... 구경하는 재미가 그보다 쏠쏠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슬쩍 가져가는 아이들이 많아 실망스럽기도 하고 손해도 많이 봤다고. 갖고 싶은 건 많은데 돈이 나올 데는 없고. 그러다 물욕이 양심을 이겨버린 아이들도 꽤 많았던 것 같다.
중고등학교에 가면서부터는 등굣길 코스가 달라져 학교 앞 문방구를 이용하게 되었다. '대웅 문구-서적'이라고 문구와 서점을 같은 공간에 있었다. 불량 식품도 없고 아기자기한 것도 없는 데다, 주로 참고서나 문제집 위주라 돈은 소비해도 시간을 소비하기는 어려운 그런 곳이었다. 아마 그 무렵부터 문방구라고 하지 않고 문구점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게 되었던 것 같다. 물론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사람들은 문구점보다는 문방구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했지만.
그러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싱크빅, 알파문구, 아트박스 같은 곳들이 생겼고, 본격적으로 '문구점'을 이용하게 되었다. 무려 40년 전 일이지만, 지금까지 그런 문구점엔 큰 변화가 없다. 오히려 가장 많이 변한 것은 초등학교 앞 문방구.
90년대, 2천 년대 초까지만 해도 학교 앞엔 문구점이 서너 곳씩 있었다. 내가 아이들을 키울 때였는데, 그 세 곳은 문구 외에 각각 다른 특색을 갖고 있었다. 한 곳은 장난감, 그 옆집은 거의 편의점 수준의 먹을거리들. 좀 떨어진 한 곳은 게임기. 그늘막까지 쳐놓은 문구점 입구에는 키 작은 게임기가 석 대 정도 놓여 아이들을 모았다. 아, 아파트 상가에 있던 문구점은 선물과 장난감, 게임기 거기에 뽑기 기계까지 있었는데, 그게 또 꽤 인기여서 문방구 주인은 아이들이 버리고 간 뽑기 껍질에 진저리를 내면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지고 쓸어 담을 정도였으니, 아무리 코 묻은 돈이라도 귀찮음을 상쇄하고도 남는 소득을 거뒀을 것 같다.
하지만 정책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면서 그렇게 잘 되던 학교 앞 문방구는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보면서 아이들 책이나 문구도 함께 사고, 아이들 수는 자꾸 줄어드는데, 학교에서 준비물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코로나로 집합금지명령이 내려 학교도 학원도 오래 쉬었다. 비대면 거래가 늘어났다.
우리 동네 학교 앞 문방구는 이제 전멸했다.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작은 개인 카페들. 살아남은 대형 문구점과 다이소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최근에는 무인 문구점이 여기저기 새로 생기고는 있지만, 글쎄. 옛날의 그 영화를 다시 보게 되기는 어렵지 않을까.
1차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 : 700만 명대 인구. 2차 베이비붐 세대(1964~1974년) : 900만 명 이상. 1차 세대보다 교육 수준 높고 IT 활용 능력 뛰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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