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anXpaper Jul 24. 2024

『텍스트의 포도밭』을 읽고

21세기에 12세기 수도사들의 독서법을 읽다

이반 일리치의 『텍스트의 포도밭』(현암사, 2016)을 읽었다. 

     

신학과 철학을 전공한 이반 일리치는 원래 사제였으나 교회를 비판하고 교황청과 마찰을 겪었다. 이를 계기로 사제를 그만두었다. 그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는지 잘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사제를 그만두고 작가가 된 덕분에 지혜로운 책을 만나게 되었으니.      


지혜로운 책이라고? 물론 내 의견에 불과하다. 이반 일리치를 처음 접하는 독자는 그 난해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H2O와 망각의 강』으로 처음 작가를 접했는데, 상당히 어려웠다. 결국 다 읽지 못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책 정리할 때 처분할 대상으로 정하고, 알라딘 중고서점에다 팔아버릴 책더미 위에 던져두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의 다른 책 『텍스트의 포도밭』에 접하게 되었다. “읽기에 관한 대담하고 근원적인 통찰”이라는 책 소개가 눈길을 끌었다. 온라인 알라딘 서점에서 미리 보기로 앞부분을 조금 읽은 뒤에 책을 구매했다. 이 책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2세기 수도사들의 독서법에 대한 설명이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았다. 덕분에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모든 걸 다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오랜 직장생활에서 자주 느꼈던 점이 하나 있다. “Less is More”이다. 직역하면 “적을수록 더 많다”이다. 업무에 대한 욕심이 많을수록 성과는 적은 법이다. 한꺼번에 두세 가지 일을 시도하면 그럭저럭 일을 마치더라도 일의 완성도는 모두 떨어질 것이다.      


이런 경험을 독서와 연관 지어 해석하면 “책을 많이 읽을수록 얻는 것은 더 적을 것이다”로 귀결된다. 더 적게 읽을수록 더 많이 얻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저것 너무 많이 욕심내어 읽기보다는 좋은 책을 골라 정독하고 묵독하고 되풀이하여 읽는 것이 더 지혜로운 독서법이다. 그런 뜻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적을수록 더 많다는 철학을 이 책 『텍스트의 포도밭』은 확실히 집어준다. 12세기 수도사 성 빅토르의 후고가 1128년에 쓴 최초의 독서법 『디다스칼리콘』이라는 책에 대한 설명서이기도 하다. 생소한 라틴어를 자주 건네는 저자의 글쓰기가 낯설고 어렵긴 하다. 하지만 마음잡고 정독하면 오히려 새롭고 즐겁고 유익한 저자의 견해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책 혹은 문자를 거울에 비유한 것이 인상 깊다. 페이지라는 거울을 통해 자아를 새로 발견하는 것이 읽기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읽기는 눈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음독하고 기억을 위해 되풀이하여 씹어 삼키는 몸짓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오늘날 우리는 빠르게 읽고 핵심만 간추려 따로 메모하는 정도로 읽기를 마친다. 12세기 수도사들은 온몸으로 읽고 기억을 통해 하나의 세계를 머릿속에 건설하고자 했다.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여 온전한 지식 세계를 걸어가며 자기만의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우리의 독서를 모두 이런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세컨드 브레인』이나 『익스텐드 마인드』의 철학 역시 일리가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광범위한 지식 네트워크에서는 문자와 메모의 연결을 통한 체계적인 지식관리가 불가피하다. 하지만 짧은 문장 이외에는 읽지 않는 21세기의 흐름에 12세기 수도사들의 독서법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책의 3분의 1은 각주인데, 하나하나 주의 깊게 읽어 볼 가치가 있다. 우리는 엄청난 테크놀로지의 시대에 살고 있으나 인류 최고의 테크놀로지는 역시 "문자"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문자가 처음 등장했을 때,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경계의 대상 1호로 여겼다. 문자의 출현에 직면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무척 당황했다. 젊은이들이 지식을 몸으로 체득하지 않고 문자의 형태로 단순히 저장만 한다면! 그들에겐 심히 경계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제 출신의 이반 일리치는 문자의 양면성을 꿰뚫어 본다.      


나는 책을 읽다가 중간에 벌떡 일어났다. 

팔아버릴 책더미에다 던져두었던 『H2O와 망각의 강』을 되찾아 서재에 가져와 다시 꽂았다. 나중에 다시 도전해야지.      


책 제목 『텍스트의 포도밭』은 의미심장하다. 눈으로만 바쁘게 읽기보다는 행간의 뜻과 맛을 음미하며 천천히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포도알 하나하나 씹어 삼키듯이. 문장을 그렇게 대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새겨둘 독서의 자세이다. 물론 모든 책을 그리 읽을 필요는 없다. 대충 목차만 흩어봐도 좋은 책이 있고, 필요한 부문만 찾아서 읽어야 할 책도 있다. 솔직히 그런 건 독서라기보단 정보 수집을 위한 메모적 활동에 가깝다. 나중에 필요하면 빨리 찾을 수 있도록 메모 상자 관리만 잘하면 되는 것들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텍스트는 정독할 대상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결론은, 읽기와 속도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독서는 훈련이고 운동이다. 




21세기 흐름에 12세기 수도사들의 독서법이 시사하는 것.

                                                                


며칠 전, 브런치 작가로 승인받았다. 

급한 마음에 옛날에 쓴 것들을 일단 몇 개 골라 발행한다. 

    

좋은 주제를 선택하여 체계적으로 새롭게 쓰고 싶다. 

하지만 목차나 구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리저리 궁리하다 머리만 긁적인다.

모르는 것도 많다. 매거진은 또 뭔가? 

다른 작가님들은 편집도 예쁘게 한다. 편집 기술은 어디서 배워야 하나?     


여하튼, 천천히 가야 할 것 같다. 

서두를수록 늦는 법. 부지런하되 급하진 말자. 

                    

작가의 이전글 [잡담] 인공지능의 미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