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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nXpaper Aug 13. 2024

누구든 나를 비난해도 좋다

글쓰기와 작가에 대한 단상


글쓰기는 우리의 생각보다 섹스에 더 가깝다.” 시인이며 소설가인 앨리스 매티슨은 글쓰기에 관한 저서 『연과 실』(The Kite and the String)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에서 앨리스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매혹적이고 위험하며 심지어는 전복적이라며, 상상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심기에 거슬리는 일이라고 했다. 그중에는, 우리를 사랑하면서도, 우리를 글쓰기로부터 떼어 놓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글쓰기가 섹스에 가깝다는 주장에 공감한다. 우리가 어떤 문장을 하나 쓰고 나서 갑자기 흥분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럭저럭 단편소설을 마무리하면 세상 전부를 손에 쥔 것마냥 희열에 빠지기도 한다. 아주 그럴듯한 에세이를 공들여 완성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글쓰기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어떤 떨림과 만족감을 가져다준다. 문제는 우리가 대체로 섹스를 잘하는 편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예외라고 생각한다) 흥분하기는 하지만, 혼자만 흥분한다면 그걸 성공적인 섹스 혹은 좋은 글쓰기라고 하긴 어렵다.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늘 매혹적인 것이 바로 섹스가 아니던가. 어느 소설가는 소설 쓰기에 몰입하게 되면 젊어지고 건강해진다고 주장한다. 피부가 화사해진다고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공감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다만 젊어지는 기분이 흠뻑 든다는 주장에는 기꺼이 수긍할 수 있다.     


앨리스 매티슨의 문장에서 더 감동적으로 다가온 것은 그다음에 적힌 대목이다. 즉, 우리를 사랑하면서도 우리를 글쓰기로부터 떼어 놓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도 있다는 문장이다. 글 쓰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가족이거나 친구, 혹은 직장 동료이다. 함께 작가의 길을 걷는 문우들은 서로 격려하거나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간혹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히는 예도 없지는 않다. 가족 가운데에서는 50%가 글 쓰는 일에 반대하며, 친구 가운데에서는 70%가 겉으로는 격려하지만, 속으로는 ‘세상에 별일이 다 있군’ 한다. 작가들끼리는 편을 갈라 동시대의 다른 성향의 작가들을 은근히 폄하하기도 한다.      


10년 전 즈음에 문학동네 시상식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지인이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하는 걸 축하하기 위해 간 자리였다. 그때 어느 원로 시인 한 분이 축사를 했는데 신인상과 작가상 수상자들에게 과연 축하해야 할지 망설여진다고 했다. 왜? 하고 나는 눈썹을 올렸다. 이내 원로 시인의 설명이 뒤따랐다. 작가라는 사람은 가족에게 등을 돌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책상에 앉아 늘 타이핑하는 일에 매달리는 사람이기에 가족에게 소홀해진다는 거였다. 그러니 작가가 된 것을 축하해 줘야 할 일인지 의문이며 축사가 망설여진다는 거였다. 훌륭한 작가가 된다는 건 그만큼 힘겨운 일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나는 축하해야 할 지인에게 축하한다고 말했다.      



몇 년 뒤 어느 날 저녁, 나는 퇴근하고 밥을 먹은 뒤 책을 읽기 시작했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인데, 아마 두 번째 읽는 시기였을 것이다. 내가 다시 읽던 곳은, 존경하는 버지니아 울프가 존경하는 샬럿 브론테를 언급하는 대목이었다. 울프는 『제인 에어』 12장을 펼쳤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었다.     


나를 비난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비난해도 좋다.  

   

이 문장을 읽은 울프는 사람들이 왜 샬럿 브론테를 비난하는 걸까? 하고 의아해한다. 사실 위는 소설 속 제인 에어가 내뱉는 독백이므로 비난을 받겠다고 자처하는 이는 샬럿 브론테가 아니라 제인 에어이다. 하지만 울프는 샬럿 브론테의 독백으로 해석한다. 샬럿이 제인이고 제인이 곧 샬럿인 셈이다. 울프는 제인 에어의 갈망 자체가 비난받는 이유라고 말하며, 제인의 목소리를 다시 인용한다.  

    


그녀의 책은 뒤틀리고 변형될 것이며...

나는 경계를 넘어 바라볼 수 있는 시력이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듣기는 했지만 본 적 없는 분주한 세상과 활기로 가득 찬 도시와 지역들까지 볼 수 있기를 갈망했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실제적인 경험을 더 많이 쌓고 싶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친분을 나누고 싶었다. 페어팩스 부인의 장점과 아델라의 좋은 점을 높이 평가하지만, 나는 그와 다른 더 생기 있는 선량함이 있다고 믿었고, 내가 믿는 것들을 직접 보고 싶었다.



누가 나를 비난할까? 의심의 여지 많은 이들이 그럴 것이고, 내가 불만투성이라고 말할 것이다. 나도 어쩔 수 없다. 불안정한 것이 나의 천성이었다. 이따금 그것은 나를 고통스럽게 휘저었다…….     


인간은 평온한 삶에 만족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인간에게는 활동이 있어야 하고, 활동을 찾지 못하면 만들어서 하는 것이 인간이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나보다 더 정적인 비운에 처해 있고, 수백만의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에 조용히 저항한다. 이 땅에 살아가는 저 숱한 삶 속에 얼마나 많은 저항이 무르익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여성들은 대체로 매우 차분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여자도 남자들과 똑같이 느낀다. 남자 형제들처럼 여자들도 능력을 연습하고 노력을 기울일 터전이 필요하다. 여자도 남자들이 고통받는 딱 그만큼의 너무 엄격한 제약과 절대적인 침체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여자는 푸딩을 만들고 양말을 짜고 피아노를 연주하고 가방에 수나 놓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동족이면서 더 많은 특권을 가진 남성들의 편협한 생각 때문이다. 여자가 관습에 따라 필요한 정도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우거나 더 많은 일을 하려고 한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것은 지각없는 행동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 수록된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 문장)



울프는 이 대목에서 샬럿 브론테의 분노에 찬 목소리를 듣는다. 읽던 책 『제인 에어』를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옆에다 내려놓는다. 샬럿 브론테는 제인 오스틴보다 더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세상에 대한 경련과 분노 때문에 결코 그 재능을 완전하고 온전한 형태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걸 알 수 있다고 분석한다. 샬럿의 책들은 뒤틀리고 변형될 것이며, 차분해야 할 대목에서 격분에 휩싸일 거라고. 제인 에어라는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해야 할 때 샬럿 자신의 이야기를 할 것이며, 옥죄이고 비틀린 샬럿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는 것 말고 다른 도리가 없었을 거라고.      


버지니아 울프는 과거 선구적인 여성 작가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작품을 썼는지를 말하고자 한 것 같다. 구시대의 여자들은 자신이 태어난 마을조차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먼 곳으로 여행이란 것은 꿈꾸기조차 힘들었고 막상 여행을 떠나도 맘 편하게 제대로 즐길 수 없었던 시대를 살아야 했다.      


샬럿이 살던 시대와 울프가 글을 쓰던 시대와는 달리 오늘날의 여건은 많이 좋아졌을까? 잘 모르겠다. 외형적으로는 분명히 다르다.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여전히 모두에게 힘든 세상이 아닌지 싶다. 오늘날에는 남자에게도 힘든 시대인 것 같다. 과거에는 작가가 존경받았고, 오늘날에도 물론 유명한 작가는 남녀 불문하고 크나큰 존경을 받는다. 하지만 무명작가 혹은 작가 지망생들은 여전히 물질적으로나 감정적으로 힘든 세상을 살고 있는 게 아닐지 싶다. 

         

어설픈 오늘의 결론은, 

     

작가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리기도 하고 누구에게든 비난받을 각오를 다져야 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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