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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nXpaper Aug 15. 2024

그녀가 흐느끼며 작별을 고한 것이 사랑이었음을

아침에 읽은 문장들

아침에 일어나 책을 읽는다는 건, 대체로 기분 좋은 출발이지만, 간혹 우리를 우울한 기분에 휩싸이게 만든다. 물론, 이 경우의 우울함이란 기껏 통속적으로 우울한 것에 불과하기에 그대가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소설과 에세이의 문장을 읽은 것뿐인데, 뭐.     


하나는 조지 엘리엇의 소설 『미들마치』 속의 문장이고 다른 하나는 카렌 블릭센의 회고록『아웃 오브 아프리카』에 나오는 문장이다.1) 아침부터 두 글을 읽고, 감동과 경탄에 빠져 두 작가의 사진을 잠시 바라보기도 했다. 책상에 앉아 물을 한 잔 마셨다. 그러고 나니 차츰 우울해지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런 멋진 문장들은 어떻게 나오는 걸까? 경험에서 나오는 걸까, 아니면 다독과 사색의 결과일까? 자괴감에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앞으로는 아침에 책 읽는 건 하지 말자. 아침에는 써야지, 왜 읽는 거야.      


오늘 아침, 먼저 읽은 대목은, 청춘이 자신의 사랑을 잃었다고 느끼는 감정이었다. 조지 엘리엇의 문장은 젊은 여인의 심리를 냉정하게 해부하는 연구자의 탐구적 시선으로 출발한다. 하지만 읽다 보면 어느새 격정적인 슬픔에 공감하게 된다.     



청춘이 희망의 계절이라면 그것은 나이 든 사람들이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품는다는 의미에서만 종종 맞는 말이다. 젊은이들처럼 자기네 감정과 이별과 결심이 최종적인 것이라고 느끼는 나이대도 없으니 말이다. 위기에 처하면 처음 겪는 것이기에 모두 최종적으로 여겨진다. 페루의 노인들이 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동요를 느낀다고 하지만 그들은 매번 충격 그 이후를 내다보고 앞으로도 많은 지진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도러시아는 빗물처럼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도 갓 피어난 시계풀처럼 얼굴 한 점 없고 지친 기색도 없이 속눈썹이 길고 풍성한 눈으로 내다보는 청춘이었기에 그날 아침 윌 래디슬로와의 작별은 그들 관계의 종결인 듯 보였다. 그는 머나먼 미지의 세월로 떠나가고 있었고, 설령 돌아온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중략) …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남들은 관심을 느끼지 않을 이야기를 하면서 느꼈던 젊은 날의 즐거움은 영원히 사라지고 이제는 과거의 보물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속으로 억누르지 않고 마음껏 돌이켜 생각했다. 비할 데 없는 그 행복도 죽었으므로 어둠에 잠겨 고요한 행복의 무덤에서 스스로도 놀랍도록 격렬한 비탄을 토해낼 것이다. 처음으로 그녀는 작은 초상화를 벽에서 떼어 자기 앞에 놓았고, 너무나 가혹한 비난을 받았던 그 여자와 자신의 심정과 판단력으로 옹호했던 그녀의 손자를 아울러 생각했다. 여자의 다정한 애정에 기뻐하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작은 타원형 초상화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그 위에서 쉬게 하고, 부당한 비난으로 고통받은 인물을 위로하려는 듯이 거기에 뺨을 댄 것을 나무랄 일로 여길 수 있을까? 그때 그녀는 알지 못했다. 깨어나기 직전의 꿈속에서처럼 새벽의 영롱한 색채로 날개를 반짝이며 잠시 다가왔던 것이 사랑이었음을. 그의 이미지가 저항할 수 없는 대낮의 당당하고 무자비한 햇살에 추방되었을 때 그녀가 흐느끼며 작별을 고한 것이 사랑이었음을.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에서)


     

조지 엘리엇이 쓴 지방 생활에 관한 이러한 연구 고찰2)을 읽다가 눈물이 하염없이 앞을 가려 흐느끼는 마음을 추스르고자 책을 덮었다. 왜 이렇게 잘 쓰는 거야? 젊은 시절 사랑의 경험과 이별의 절망을 겪어야만 나오는 문장일까? 


차분한 마음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연과 일상을 평이하게 그린 에세이 문장을 읽기로 마음먹고서, 카렌 블릭센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펼쳤다. 시적이고 담담하고 절제된 문장은 역시, 친애하는 그대 카렌 블릭센이지, 하면서.      



… 농장주는 마지막으로 북쪽을 보는데 북쪽은 결국 우리가 돌아갈 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무심코 북쪽 하늘에서 큰곰자리를 찾아보지만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그는 지금 조용히 물구나무선 자세로 있는 것이기에 큰곰자리가 보일 리 없다. 그건 북유럽 이주민의 기분을 유쾌하게 해주는 곰 같은 유머이다.    


(적도 이남 지역에서는 큰곰자리가 보이지 않는 게 당연하지. 적도 아래에 사는 남반부 사람들은 모두 거꾸로 매달린 거나 다름없어서 물구나무선 자세로 지내고 있다고 여기는 게 재미있군. 맞아, 기울어진 인간들 같으니라고. ㅎ)       


밤에 잠을 자면서 꿈을 꾸는 사람들은 낮의 세계가 갖지 못한 특별한 종류의 행복에 대해 안다. 그것은 평온한 황홀이고 마음의 편안함이며 혀 위의 꿀과도 같다. 그들은 또한 꿈의 진정한 영광은 무한한 자유의 분위기에 있음을 안다. 그것은 자기 의지대로 세상을 휘두르는 독재자의 자유가 아니라 의지가 없는, 의지로부터 자유로운 예술가의 자유다. 진정으로 꿈꾸는 자의 기쁨은 꿈의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다.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자신의 통제력 밖에 있으며 자신이 간섭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가 듣도 보도 못한 멋진 풍경이 저절로 생겨난다. 멀리까지 펼쳐진 멋진 풍경, 풍부하고 섬세한 색채, 길, 집 들. 낯선 이들이나 친구들이나 적들이 뜬금없이 나타나기도 한다. 꿈속에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쫓고 쫓기는 장면 또한 황홀하다. 그리고 꿈속에서는 누구나 매우 재치 있는 말을 한다. 낮에 기억해 보면 그 의미가 퇴색되는 건 사실이지만 이는 밤과 낮이 다른 세계에 속하기 때문이며 밤에 다시 잠자리에 눕는 순간 세계가 바뀌고 그 의미는 되살아난다. 그리하여 어마어마한 자유의 느낌이 그를 둘러싸고 마치 공기와 빛처럼, 천상의 기쁨처럼 그를 관통한다. 그는 아무 할 일 없는 특권을 지닌 사람이며 모든 일이 저절로 성사되어 그에게 풍요와 기쁨을 준다. 다시스의 왕들이 그에게 선물을 가져다준다. 그는 큰 전쟁이나 무도회에 참석하며 그런 와중에 자신이 누워 있는 특권을 누리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그 순간 그는 자유의 의식을 잃게 되며 필요에 대한 의식이 꿈의 세계를 침범하면서 조급함과 긴장감을 느낀다. 편지를 쓰거나 기차를 타야 하고 일을 해야 하거나 꿈속의 말들을 달리게 하거나 총을 쏘아야 한다. 그렇게 꿈은 퇴조하여 가장 열등하고 저속한 꿈의 형태인 악몽으로 변한다.  


(카렌 블릭센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시적이고 절제된 에세이의 모범 - 아웃 오브 아프리카


마음을 잔잔하게 다스리려고 펼친 책인데, 이상하게 감정이 더 고조되고 말았다. 문장을 읽다가 책을 내려 놓는다. 서서히 짜증이 일었다. 도대체 뭐야, 왜 이렇게 잘 쓰는 거야. 아프리카에서 17년 정도 살아야 이런 환상적인 문장이 나오는 건가? 아프리카에 갈 수도 없고… 자괴감의 무게가 두 배나 더 커지는 느낌이 들었다. 방구석에 갇혀 지내는 요즘.      


그래도, 읽기는 유익하다.      


젊음이 희망의 계절이라는 건 종종 나이 든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고, 사랑을 잃은 젊음이 끝없이 절망하는 대목에서 슬프지만 좋았다. 내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고, 자주 우울하게 거리를 걸어 다닌 기억도 되살아났다. 남반부의 아프리카 은공 언덕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경험도 간접적이지만 체험할 수 있어 좋았다. 천상의 꿈길이 서서히 악몽으로 변하는 과정도 내게는 더없이 환상적이다. 나 역시 꿈속에서 재치 있는 말을 하고 주기적으로 쫓고 쫓기는 장면을 연출한 적이 있었음을, 분명히 그런 꿈을 꾼 적이 있었음을.                





1) 조지 엘리엇은 요즘 열심히 탐구하는 작가이고, 카렌 블릭센은 오래전부터 좋아해 온 작가이다. 여자 작가만 좋아하냐고 묻는 사람에게 나의 대답은 한결같다. 그럴 리가! 

2)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는 부제가 지방 생활의 고찰이다. 원서의 영어 제목은 다음과 같다. Middlemarch – A study of Provincial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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