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국에서 일을 한다는 건, 단순히 돈을 버는 문제가 아니라 여기에 계속 있어도 되는 사람이 되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다행히 또 다른 지인 O의 도움으로 학교를 졸업하던 21년 4월 말부터 슈퍼마켓 안에 있는 베이커리 코너에서 일을 시작했다. 컬리지를 졸업하면 3년간 유효한 워크퍼밋을 신청할 수 있었고, 신청만 해도 정식 승인 전까지는 합법적으로 풀타임으로 근무가 가능했다. 매니저는 심사 과정에서 생길, 예상치 못할 문제를 우려했다. 워크퍼밋이 승인되기 전까지는 학생 신분으로 허용되는 20시간만 일하자고 제안했다. 아이의 학교가 6월 말부터 방학이 시작될 예정이었으므로 나에게도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처음 시작하는 일이었고, 나 역시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8월까지 한 주에 이틀정도만 일을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아직 나라 곳곳에 퍼져 있었지만 조금씩 규제가 풀리기 시작했고, 한동안 꽁꽁 얼었던 경제생활을 정상적으로 만들어야 했으므로 마스크만 잘 착용하면 웬만한 활동은 할 수 있었다. 아이의 방학이 시작하고 나서, 일하지 않는 날에 종종 런던 근처의 다른 도시를 찾았다.
이번 여름을 통해 나와 아이 둘이 지내는 캐나다 생활에 조금 더 한 발자국 내딘 기분이 들었다. 코로나로 많은 수업이 온라인으로 대체되어 막상 학교는 며칠 가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자꾸 쌓이는 과제와 퀴즈를 하느라 입버릇처럼 아이에게 '잠깐만, 기다려줘. 좀 이따' 따위의 말을 했었다. 그런 방해 없이 오랜만에 하루 종일 같이 시간을 보내며 같이 일어나고 같이 잠든 여름이었다.
이제 막 5살이 된 아이는, 생각보다 체력이 좋았고 겁이 없었다. 온타리오에서 그나마 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블루마운틴에 갔을 때였다. 겨울에는 스키를 많이 즐기러 가는 곳이지만 여름이라 별로 즐길거리가 없을까 봐 출발 전에 걱정을 했었다. 마운틴코스터라는, 일 킬로 정도의 길이로 만들어져 있는 트랙을 따라 타고 내려오는 놀이기구가 있었는데 아이는 그것을 꽤 즐겼다. 시속 42킬로미터까지 속도가 올라간다고 했기에 처음에는 겁이 나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장치로 속도를 조절하며 내려왔다. 우리가 어찌나 천천히 내려왔던지 그 뒤로 약간의 교통체증이 생기기도 했다. 아이의 제안에 다음부터 속도를 줄이지 않고 내려왔다. 키 제한으로 아이가 내 앞에 앉아야 해서 느끼는 속도감이 나보다 더 높았을 텐데 나보다 더 즐겼다. 다시 올라가야 하는 번거로움과 기다려야 하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한번 더'는 몇 번이나 계속되었다. 반복되는 스피드에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꼈던 나는 보트를 타러 가보는 것은 어떻겠냐는 말로 은근슬쩍 그 자리를 떠났다.
토론토 인근에 있는 원더랜드라는 놀이동산에도 다녀왔다. 아이의 첫 놀이동산이라 피곤할 수도 있으니 일찍 갔다가 일찍 나올 계획이었다. 아이의 키와 신체조건으로도 혼자 혹은 함께 탈 수 있는 놀이기구가 제법 많았다. 우리는 그 놀이기구를 모두 다 즐기고도 더 타고 싶은데 아쉽다는 대화를 나누며 영업시간의 종료 시간에 나왔다. 토론토에서 보트를 타고 십여분 정도면 갈 수 있는, 온타리오 호수에 있는 토론토 아일랜드는 분주한 도심 속에서 찾을 수 있는 평화로운 해변이었다. 뙤약볕 아래에 모래만 있어도 즐거운 아이와 점점 뜨거워지는 해를 견디지 못하고 몸을 베베 꼬며 이동하고 싶은 나는 옥신각신 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방학이 끝나가던, 날이 좋았던 어는 날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유람선을 탔다. 나는 18년도 가을에 캐나다에 답사를 왔을 때 유람선을 탔었다. 유람선에서 제공되는 비옷을 입어도 다 젖는다는 후기를 보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갔었지만 물이 거의 튀지 않아 나의 철저했던 준비성이 민망했었다. 이번에는 그냥 갔다. 그런데 웬걸. 예전에는 서늘해지기 시작한 10월의 밤이어서 유람선의 운행이 아주 얌전했던 거였다. 한 여름 낮에 탄 유람선은 떨어지는 폭포 속으로 들어가기라도 할 기세로 폭포 앞으로 다가갔다. 거센 폭포 물줄기가 바람 때문에 사방에서 날아와 눈을 제때로 뜨기도 어려웠던 우리는 흠뻑 젖었다. 다소 무서워하기도 했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던 비옷을 벗으며 깔깔거렸고, 뜨거웠던 태양볕 덕에 옷도 금세 말랐다.
캐나다에서 드디어 학교 생활을 시작했지만 학교에 간 날보다 아이패드 앞에서 친구들을 만난 날이 더 많았던 아이와, 남편 없이 혼자 시터의 도움을 받으며 학업을 마치고 일을 시작한 나에게 후시딘 같았던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캐나다에서 세 번째 이사를 마치고 아이의 학교도 이사한 동네 바운더리로 옮겼으며 나도 풀타임 근무를 시작했다. 아이도 나도 즐겁게 캐나다 생활을 다시 해 볼 용기를 얻은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