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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ihyun Dec 07. 2018

바쁠수록 천천히, 두 번째

그 실패의 기록

오늘도 해야 할 일이 쌓여 있기에 며칠 전처럼 '오늘 하루 휴가' 내지 '오늘 꼭 해야 할 일 무엇?'을 생각해 보았다. 따지고 보니 오늘 꼭 해야 할 일은 없었다. 미루어도 괜찮은 일들뿐.


며칠 동안 피곤했던 터라 늦게까지 휴식을 취하고 느지막이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일을 하러 갔다. 시스템에 접속해서 새로 온 통지서가 있나 확인했더니 하나 있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열어 봤더니 아뿔싸, 거절이유였다. 비교적 쉽게 심사가 통과되는 물품이라 의아함 반, 내가 중요한 걸 놓친 건 아닐까 하는 조바심 반으로 스크롤을 내렸다.


부분디자인 출원인데 출원서에 '부분디자인'이라고 체크하지 않았다는 거절이유였다.

한편으론 다행이었다. 신규성이 없다거나 그 밖에 예상하지 못한 이유였으면 쇼크를 먹었을지 모른다.


나는 '전문성'과 '숙달'이 중요한 사람인지라 창피하고 부끄럽기도 했지만 보정서만 제출하면 해결되는 문제이니 그깟 보정서 작성하기로 했다.


서식작성기를 열어 보정서를 만드는데, 내가 이런 보정서를 작성해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해당되는 항목을 찾고 찾아 클릭은 했는데, 심사관이 예시로 보여 준 '보정내용'란은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SOS를 치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사람이 없었다. 다른 도시에 계신 전문가님과 원격 상담이 가능하다면 컴퓨터를 보여 드리고 '이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 물었겠지만 그럴 수도 없었고, 찾아가기엔 너무 멀게 느껴졌다.

방법은 하나. 콜센터에 전화를 거는 것이다.
웬만한 절차는 다 알고 계시는 콜센터 상담원께 문의를 했다. 보정할 때 위임장이 별도로 필요한지도 궁금했기 때문에 사무소임을 솔직하게 밝힐 수밖에 없었다. 두 번 전화를 걸어 (사무소임을 밝혀야 하는) 위임장 따로, (사무소임을 밝히지 않아도 되는) 보정서 따로 물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한 번에 묻기로 했다.

보정할 땐 위임장이 별도로 필요하지 않다는 대답을 들었고, 심사관이 예시해 준 내용은 서면제출의 경우라 서식작성기로 제출할 땐 '보정내용'이 없다는 얘기도 들었다.


괜한 자격지심 때문이겠지만 '사무소'임을 밝히고 나니 상냥하고 친절하던 상담사의 태도가 싸늘해지는 느낌이었다. 당신들이 업으로 하는 일이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데 왜 우리에게 묻냐고 항변하는 듯한...


하지만요, 그치만요, 저는 관리부 직원을 두고 있지 않은-둘 형편이 못 되는-1인 기업이고, 시험을 볼 땐 실체적인 법률을 공부하지 서식작성기를 공부하지 않아요. 게다가 저는 대부분의 경력을 사무소가 아닌 기업에서 쌓았고, 개업할 생각이 1도 없었던 사람이라 관리프로그램은 20세기에 첫 직장에서 잠시 접해 보았던 게 다예요. 게다가 여기는 이 일에 경력을 가진 관리부 직원을 찾기도 힘든 곳이에요. 사무소 직원들이 모여 있는 인터넷 카페라도 있으면 가입해서 같은 사례를 찾아보고, 물어보고, 하소연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여튼 보정서를 작성해서 제출하고, 굳이 오늘 하지 않아도 되는 다른 일도 했다.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몇 시간씩 앉아서....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니 어느덧 저녁 약속 때문에 나갈 시간이었다.


버스 하나를 놓치고, 조금 먼 곳에 세워 주는 다른 버스를 타고 눈발 흩날리는 거리를 걸어 약속 장소로 향했다. 10분쯤 늦었고, 다른 분들께 늦어서 죄송하다고 인사드리고 밥을 먹었다.  


오늘도 분명 아침엔 '휴가'라는 마음으로 여유 있게 시작했는데 왜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약속에도 늦었을까?


거절이유 때문에 잠시 이성(?)을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절되었다는 부끄러움, 절차를 잘 모른다는 두려움, 제출일자가 두 달이나 남아 있는데도 마음은 자꾸 미래로 가서, 나중에 누군가에게 이 사실을 들키면(?) 업신당하고 무시당할지 모른다는 근거 없는 공포로 얼른 일을 처리했던 것 같다.

콜센터에 전화를 할 땐 다음에 내용을 확인하려고 대화를 녹음하는데, 상담사와의 통화 녹음을 다시 들어 보니 사무소라고 밝힌 뒤에도 그렇게 불친절해지지는 않았다. 정말로 나의 자격지심 때문이었나 보다.

나는 한편으론 타인의 시선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데, '성과', '결과' 등에 있어선 남의 시선을 굉장히 많이 의식한다는 걸 다시금 깨달은 하루였다.

써 보지도 않은 프로그램은 모르는 게 당연하고, 개업을 염두에 두고 다른 사무소에서 관리직 업무를 익힌 것도 아니고, 처음이라면 누구나 서툴고 실수할 수 있는데, 처음부터 완벽하고픈 이상한 욕심, 처음부터 잘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은(대체 누구에게? 보여 줄 사람도 없는데 이게 정말 기이하다) 이상한 마음 때문에 여유 있는 하루를 보내지 못한 듯하다.

정, 반, 합의 변증법처럼 잘 될 때도 잘 안 될 때도 경험하며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겠지. 그래도 이렇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나를 바라볼 수 있어 후련하고 감사하다.

오늘은 바쁘게 하루를 보냈지만 또 여유 있게 자각하며 하루를 보내는 날이 올 거야. 그러다 또 정신없이 보내고, 그러다 또 여유를 되찾고... 그러기를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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